DNA에 '그린'이 있었어

by 이곰

바이오필리아(Biophilia).


하버드대학교 생물학과 교수 에드워드 오. 윌슨은
『바이오필리아』라는 책에서

인간은 본래 자연과 함께 살아왔고
그 기억과 성향이 DNA에 내재되어 있어
‘녹색 갈증’, ‘자연 회귀’ 같은 본능적 행동을 보인다고 말했다.


처음 이 이론을 들었을 때는
조금은 파격적인 주장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 과장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일단, 우리 집 곳곳에
녹색 갈증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소파 위 쿠션 두 개.
하나는 진한 녹색,

다른 하나는 식물 잎이 프린트된 쿠션이다.
살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덩굴식물의 잎과 줄기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5년쯤 전에 구입한 가구의 색깔도
올리브그린.
당시엔 그냥 ‘무난하다’고 생각하고 샀는데
이제 와 돌아보니
선택에는 이미 방향성이 있었다.


욕실에 걸린 수건도 그렇다.
회사 창립기념일마다 받은 수건을

쓰다 쓰다
이건 아니다 싶어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산 수건.


홈쇼핑에 여덟 가지 색이 있었는데
고르고 고른 색 역시 올리브그린이다.


최근에 큰맘 먹고 산 이불 세트도
덩굴식물의 줄기와 잎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취향은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히 한 방향으로 흘러왔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시작은 아주 오래전 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 우리 집 베란다에는
화분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주로 난들이 많았고 키가 큰 동백나무가 있었다.

특히 동백나무는 큼직한 동백꽃을 겨울 내내 피워댔다.


그땐 몰랐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자연과 함께 있던 기억’으로
몸 어딘가에 저장되고 있다는 걸.


식물을 키우기 시작한 지금,
나는 종종 이유 없이 편안해진다.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고,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설명하기 어려운 안정감이 찾아온다.


어쩌면 나는
새로운 취미를 만든 게 아니라
DNA 어딘가에 저장돼 있던 감각을
다시 꺼내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DNA에

원래 그린이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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