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터널에서
시월의 정원은 적막하다. 봄 여름 순서를 달리하며 정원을 밝혀주던 꽃들과, 꽃을 찾아 윙윙대며 간지러운 소음을 내던 벌들은 일찌감치 퇴장했다. 푸르게 무성하던 나무들은 숱이 엉성해지는 중년의 머리칼처럼 퇴색되고 말라버린 잎들을 떨구고, 여름 더위를 피하려 물을 담은 정원 돌확을 찾아주던 새들의 방문조차도 뜸해진다.
해조차 숨어버린 스산한 하늘을 머리에 인 가을날엔 마음속 깊은 곳 갇혀 있던 우울이 열린 판도라 상자에서 깨어 나와 기지개를 켠다. 우울과의 동거는 삶과 죽음의 중간쯤이다. 도인이나 성자처럼 욕망에 초연해지니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한때 삶에 기쁨을 주던 즐거움들은 권태와 무기력으로, 가치 없고 가증스러운 위조지폐가 되어버린다.
우울을 달래 줄 꽃도 새도 벌도 사라진 정원을 하릴없이 서성이며 일감을 찾는다. 떨어진 나뭇잎을 비로 쓸어 담고, 삐죽이 웃자란 나뭇가지를 잘라낸다. 잔디 속 숨어있는 잡초들을 뽑느라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몸을 혹사하며, 마약처럼 우울과의 동거를 뿌리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벌을 준다.
그때 무심한 시선 끝을 붙잡는 보라색. 소나무 밑 남천 수풀 더미 속에 이름 모를 여덟아홉 꽃송이가 꼿꼿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었다. 강아지풀처럼 생긴 소복한 꽃송이들이 성화 속 성인들처럼 머리에 하나씩 후광을 두르고 진한 보라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스마트 폰으로 검색해 보니 ‘꽃향유’라는 여러해살이풀이었다.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풀 씨앗이 어쩌다 나의 정원에 날아와 꽃을 피웠나 보다. 일부러 식재하지 않은 풀들은 모두 잡초로 간주하고 틈만 나면 뽑아댔던 내 손길을 용케 피하고 살아 꽃을 피운 것이다.
가슴이 떨렸다. 가을꽃 하나 없는 퇴색한 이 정원에 작은 보라색 등불을 들고 찾아와 나의 우울을 위로해 주는 손님. 이름도 어여쁘게 향기로운 기름을 머금은 꽃. 9월부터 꽃피기 시작해 가장 늦게까지 산과 들을 수놓는 고마운 꽃. 꽃들이 사라진 정원을 떠나 보이지 않았던 작은 꿀벌들도 어느새 나타나, 꽃향유 꽃에 매달려 가을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있다.
인생은 살아가기 마련. 어느 때는 뜻밖의 손님이 나를 살리기도 하는 법. 가장 늦은 계절까지 피는 이 꽃손님을 친구 삼아 우울의 터널을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