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 속에 가라앉아 있다. 물 위는 거친 파도와 때마침 세차게 퍼붓는 비로 아마겟돈처럼 소란스러운데, 물속은 진공의 우주 공간처럼 조용하다. 공포를 느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어머니의 자궁 속을 유영하는 태아처럼 편안하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 평온감에 온몸을 맡긴다.
딸아이 대학 입시로 몸과 마음이 몹시 바쁜 시기였다. 평소처럼 집안일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 심장에 말뚝처럼 꽂힌 듯, 가슴이 죄었다. 마치 누군가 야구 방망이 끝으로 심장을 으스러뜨릴 듯 누르는 것 같은 통증이 가슴과 목을 타고 턱으로 전류처럼 퍼졌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턱과 관자놀이에서 여진처럼 계속되는 것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죽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고 이렇게 어이없이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로 옆에 남편이 있었지만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에 도움을 요청하기는커녕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이런 발작 증세가 두어 번 있고 나서 병원을 찾았고, 변이성 협심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혈관이 경련을 일으켜 협심증 증세가 나타나는 병이라고 한다. 일반 협심증과는 달리 원인도 알 수 없고 예방책도 없단다. 단지 혈관의 수축을 막는 약을 매일 먹고, 만약의 경우를 위해 니트로글리세린(협심증으로 인한 심장발작 완화제)을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수면 중 발작이 오면 돌연사할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따라붙었다. 어쩌라고...
걱정해야 할 만큼의 소유물은 별로 없지만 유언장을 작성했다. 쓰지도 않으면서 소유욕에 움켜잡고 있던 물건들도 남에게 주거나 팔면서 정리해 나갔다. 모든 것이 정리되면 이제 돌연사만 맞이하면 되는 것인가. 헛웃음이 나왔다.
말썽 한 번 일으키지 않았던 어린 시절과 학교 성적에 집착하느라 한 눈 한 번 팔아본 적이 없었던 학창 시절까지 모두 부질없이 느껴졌다. 바깥 세계의 햇빛과 화사한 꽃들에도 관심 없이 자신의 작은 굴속에서 먹이를 모으고 새끼를 키우는 두더지처럼, 우직하게 이 십여 년 동안 집이라는 공간밖에 모르고 살았던 지난 세월도 후회스러웠다. 지구에 한쪽 면만 모습을 보여주는 달처럼, 인생은 나에게 책임과 성실, 체면이라는 얼굴만 보여주었다. 나는 인생의 다른 면은 알지 못했다. 젊은 시절, 세상엔 궁금하고 재미난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언젠가는 꼭 해보리라는 다짐으로 내 마음은 얼마나 부풀었던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쓰디쓴 병자의 입맛처럼 아무것도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내 마음은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살아, 나는 법도 날아가겠다는 의욕조차도 잃어버린 새가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서핑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게 되었다. 뭐 어때... 돌연사보다는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9월 초순 부산 송정 해수욕장이었다. 여름 해수욕 인파가 이미 사라진 가을 바다는 그날따라 좀 사나워 보였다. 제일 먼저 눈에 띈 서핑 샵에 들어가 수업 신청을 했다. 그날은 태풍 예보가 있어서 써퍼들로 북적이던 바다가 한산했다. 서핑에 대해 무지한 나이 오십 대 우리 부부를 스무 살 막 넘어 보이는 앳된 강사가 가르친단다.
처음인데도 잘한다는 어린 강사의 칭찬에 아픈 허리도 무릎도 잊어버리고 파도를 탄다. 재미있다. 심장이 쪼그라들고 간이 벌렁거려도 재미있다. 점점 세지는 태풍으로 써퍼들의 예약이 취소되었단다. 안전에 대한 책임에 무지몽매한 어린 강사는 산처럼 밀려오는 검은 파도에도 아랑곳없이 우리를 바다로 내몰고 간다.
“파도가 밀려올 때는 보드를 꼭 껴안고 납작 엎드려야 해요, 안 그러면 돌아가는 세탁기 속 빨래들처럼 빙글빙글 돌며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을 수도 있어요,”
아직 얼굴에 솜털이 보시시한 어린 강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자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의사처럼...
“엎드려욧!”
강사가 소리친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보드를 껴안고 납작 엎드리고 있으면 집채만 한 검은 파도가 머리와 등 위를 쑥 훑고 지나간다. 그렇게 파도를 헤치며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파도를 기다린다. 좋은 파도가 나타나면 “올라타세욧!” 하는 강사의 외침에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는용맹한 병사처럼 보드에 올라탄다.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무게 중심을 아래로 둔 채 균형을 잘 잡고 있으면 파도가 해변까지 거침없이 밀어준다. 재미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태풍과 성난 파도가 고마웠다.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초보 써퍼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간 어린 강사의 무모함이 고마웠다. 굳은살이 잔뜩 박혀 둔감해진 내 마음에는 이렇게 강한 자극이 필요했나 보다.
두어 주 후에 서핑을 위해 다시 송정 해수욕장에 갔다. 가을비를 뿌리는 대기가 서늘했지만 바다에는 써퍼들이 꽤나 눈에 띄었다. 태풍예보가 없었는데도 파도가 적지 않았다. 슬그머니 겁이 나는 마음을 스스로 꾸짖었다. ‘인생이라는 파도는 이것보다 더 무시무시하잖아. 괜찮아. 이깟 파도는 아무것도 아냐.’ 어느새 두려움을 잊는다. 아니 모든 것을 잊는다. 그저 파도와 파도가 밀어주는 보드 위의 나 자신만이 여기 있다.
삐끗, 보드에서 미끄러져 바닷물에 빠졌다. 얼마나 깊을까... 발이 닿지 않는다, 몇 번 허우적거려도 몸이 뜨질 않는다. 어라, 이렇게 죽는 건가. 그런데 물속의 고요함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파도를 탄다는 흥분과 재미로 과다 분비된 도파민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두뇌는 필사적인 몸부림을 명령하질 않는다. 이대로 물속에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간다. 어린 시절에서 어머니의 자궁 속 태아 시절로, 헤아릴 수 없는 먼 과거 우주 속 하나의 입자로 빠르게 거슬러 간다. 짧은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두서없는 의식의 흐름 앞에 남편의 얼굴이 턱 하니 막아선다. 해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남편이 걱정하겠구나 싶은 순간, 보드와 내 발목에 연결된 써퍼들의 생명줄이라는 리쉬(서핑보드에 연결된 줄로서, 써퍼의 발목에 묶어 바다에 빠졌을 때 줄을 잡아당겨 보드에 올라탈 수 있음)가 생각났다. 더듬더듬 발목에서 리쉬를 찾아 잡아당기니. 멀리 튕겨나갔던, 생명을 구해줄 보드가 따라왔다.
기운 차 보이는 파도를 골라 다시 올라탄다. 심장이 쪼그라들고, 간이 벌렁거린다. 멀리 해변에서 나를 향해 환호하는 남편의 시선을, 서핑보드와 나를 연결해 주는 리쉬줄처럼 움켜잡는다. 함빡 웃는 그의 모습이 분장한 피에로처럼 슬퍼 보인다. 남편에게도 미끄러져 간다. 함께 일구어 온 반평생을 돌연 부질없어하는 아내를 어떻게든 삶으로 다시 데려오려는 내 불쌍한 반쪽, 남편을 향해서 나는 파도를 타며 해변으로 나아간다. 처음인 듯 그의 품에 안기기 위해 파도를 타며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