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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Apr 21. 2023

해로운 희망을 안고

<공직문학상 작품집을 읽고>

 피곤이 꽤 쌓였던 모양이다. 지난 주말 머나먼 서울에 가서 자격증 시험을 응시하고는 집에 와서 바로 곯아떨어졌다. 다행히도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낮잠까지 모두 합하여 열두 시간 넘게 잠에 빠져 있었다. 휴일에 잠만 잤다는 사실이 아까웠지만 그만큼 피로를 풀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니 오히려 좋았다. 체력을 충전하고 나자 새로이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공직 문학상을 목표로 글을 쓰기 전에 과거 수상작들이 궁금했다. 휴식에 취하는 겸하여 작품집을 읽어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좌절했다. 수준이 너무 높았다. 그중에서도 2020년의 '달, 달'과 2021년의 '책 도둑'이라는 작품이 특히 오래 마음에 남을 듯했다. 작품집을 읽었던 사람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이 글을 읽고 추후에 이 작품들을 접할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담 없이 두 작품에 대해 소상히 소개하고자 하니 공개적인 자리에 적는 글인 만큼 스포일러에 양해를 바란다.




 먼저 2020년 공직 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은상에 빛나는 '달, 달'은 아이를 임신하고자 하는 직장인 여성의 이야기이다. 국가 지원의 한도를 넘어 오롯이 자부담으로 난자를 채취하며 소설은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이는 오지 않는다. 더 이상 엉덩이에 근육주사를 맞을 자리도 없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엄마가 되기를 꿈꾼다. 결국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는 희망으로 주인공의 뱃속에 쌍둥이가 자리 잡는다. 애달이와 복달이라는 태명도 지어준다. 주인공이 고래 두 마리가 등장하는 꿈을 꾸었을 때 태몽이라는 실감이 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부터 독자는 불안하다. 달려드는 고래들을 피해버리다니... 이러한 독자의 불안감과는 관계없이 다만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주인공과 남편의 분위기는 달달하다. 남편의 직장에서 부는 권고사직의 피바람도 견딜 만하다. 하지만 하혈의 순간 이 모든 행복이 흘러내려간다.


 태동도 없이 자궁이 열리니 아이를 떠나보내지 않으면 엄마가 죽는다. 어떻게든 버티려는 엄마는 실신하고 깨어난 순간 뱃속이 허망하다.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울음소리 외마디 들려주지 않고 아이들은 그렇게 떠난다. 미리 사둔 아기용품과 초음파 사진이 지옥의 가시와 불처럼 엄마를 괴롭힌다. 하지만 아직 한 번 더 분만실을 찾아야만 한다. 태반이 다 나오지 않아 자궁에 계속 상처를 입혀댔던 것이다. 결국 엄마의 피에 씻어 아이를 떠나보내고 그녀는 죽음처럼 살아간다. 다만 시간은 상처를 묻어도 치유는 반드시 필요하다. 수 년이 지나 남편과 함께 아이의 장례식장을 찾아 돌아오는 길, 할머니를 수목장한 나무 아래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고백한다. 처음 접하는 그녀의 사투리가 묵직하도록 정겹다. 그리고 깊은 밤, 남편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에서 소설은 끝난다.




 2021년 공직 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금상인 '책 도둑'은 서준이라는 인물이 책방을 내며 시작한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다가 그만의 별을 찾아 천안에 자리를 잡는다. 제주에 책방을 내고 싶은 애초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나름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참고서를 찾는 사람만 있던 책방은 손님이 올려 주는 감성 인스타 덕에 겨우 운영비를 충당한다. 타협하였더라도 꿈은 꿈이다. 이제는 다짜고짜 기사 노릇을 하라는 돈 많은 중년 여성의 명령에 거절할 수도 있다. 대신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은 파란 치마를 입은 책도둑이다. 서준은 그녀가 수 주 동안 대여섯 권의 책을 훔치는 장면을 CCTV로 확인한다.


 그녀의 이름은 진경, 사이비 종교에 빠진 남동생 민석과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아빠가 자살한 후 감당해야 했던 어머니에 할머니까지, 진경이 감당해야하는 가족은 그녀의 몸이 그녀의 것이 아니도록 만들었다 진경의 유일한 취미라면 시외버스를 타고 청주공항에 가서 제주도 여행 서적을 읽는 것이다. 진경을 제외한 회사 여직원 4명에게는 무리해 서나마 갈 수 있을 여행을 그녀는 그렇게 즐긴다. 하지만 서점 주인이 자신의 도둑질을 눈치챈 모양이다. 주말에 제주도에 여행을 가기 위해 책방을 비워야 하겠다며 고양이에게 물고기를 맡기는 것이 아닌가?


 그 주 주말, 진경은 못 이기는 척 빈 책방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책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책을 사려는 손님에게 현금으로나마 계산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렇게 평화로이 주말을 보낸 일요일 밤, 민석이 집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며 난동을 부린다. 다음 날 아침 진경이 회사의 감원 대상이라는 소문이 돌고, 그녀의 머리도 핑 돈다. 진경은 사무실 키보드에 구토하고, 쫓기듯 찾은 화장실에서 뇌출혈로 사망한다. 책방에 돌아온 서준은 주말 동안 다섯 권의 책을 팔고 남겨둔 현금 11만 원을 보며 이름 모를 책 도둑과의 인연이 끝났음을 짐작한다.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이라는 장편소설에서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았던 희망에 대해 서술했던 내용이 기억난다. 온갖 나쁜 것들과 함께 희망이 담겨 있던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희망은 해로운 거니까. 잡을 수 없는,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욕심을 만드는 희망은 해롭다고 한다. 내 마음에 깊이 남았던 두 수상작 모두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좌절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최근 제출했던 작은 공모전들에서 모두 낙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진정 희망이란 해로운 것일까?


 하지만 희망하고 좌절하는 과정이 없다면 창작할 거리도 없다. 지난주에 보았던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점자로 읽는 영어 실력이 남았고, 공모전에 떨어졌더라도 나만의 글은 남는다. 시력을 잃었기에 전혀 몰랐던 세상에 전율한다. 부러우면 지는 거란다. 나는 이미 과거의 수상자분들에게 졌지만 이 글을 놓지는 않으련다.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어떠랴? 그렇게 살았던 내가 남는다. 그래서 나는 다시금 키보드를 두드린다. 좌절을 재료로 희망을 동기로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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