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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성일 Oct 25. 2022

2.3 희망 그것이 가장 나를 괴롭히는 단어이긴 하다.

‘희망찬 내일을 위하여 오늘은 노력해라.’ 작자 미상의 글이지만 어릴 적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릴 적 나에게 너무나도 와닿았다.나에게 희망이라도 주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거 마저 없으면 내 앞에 가로막은 암담한 미래가 두려웠기에 겁이 났다. 그러다 나는 희망 뒤에 숨어서 그저 희망만 바라보는 멍청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오늘을 제대로 살지 않고 기적을 바라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도 가장 마지막에 남아 있던 것은 희망이었던 것처럼 희망이 올 것이라는 기적을 바라고 살았다. 원래 판도라의 상자 안에 희망은 포기하지 말아라라는 교훈을 주는 희망이라는 단어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거저 주는 기적 같이 생각해 버렸다. 나는 어쩌면 이기적인 단어로 생각 했던 것 같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어찌 보면 아름 다운 단어이지만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단어이기도 하다 희망이 무너졌을 시에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기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더 절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의 희망이 정체였다. 사람들이 존재할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를 신을 믿는 것과 희망은 나에게 같은 맥락의 이야기였다. 신은 언제나 내게 응답해주지 않았다. 희망 역시도 언제나 내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이라는 신을 믿어 버린 것 같다. 그 희망을 믿어서 언제나 좌절을 맛보게 하였다. 희망을 믿고 살아 가면 시절들이 좌절이 시간이 반복되어 좌절에 무뎌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희망을 믿고 나아가는 건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이후 희망이라는 단어를 믿고 나가기를 포기했다.희망이라는 단어를 내 안에서 빼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만큼 나에게는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이 세상에 기댈 곳이 없어져 버린 그런 기분이었다. 머리 속으로는 희망이라는 단어는 그저 한낱 환상에 불과한 단어라고 세뇌하듯이 생각하며 내 안에서 떨쳐 내고 보니 힘든 과정들이었지만 그 과정들이 내가 희망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나를 좀 더 믿어 보기로 했다. 내가 노력 한 만큼의 기대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꿈은 크게 가져’ 라며 말한다.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이다. 꿈을 크게 가지면 그 꿈은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헛된 희망만 가득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크게 가지라 한다. 남들은 그것이 잘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너무도 미련한 짓이었다. 나 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는 준비하지 않고 나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는 간절함을 담은 기도에 불과했다.간절히 바란다고 모든 것은 되지 않는다. 준비하고 노력하고 나서 간절히 기도해야 들어주는 것이다. 사람들도 이 부분에 대해선 착각하는 것 같다. 자신이 행동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희망도 기대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나로서 나의 힘으로 모든 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니 나의 기대와 희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꿈은 크게 가지라는 의미와 희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말이다. 꿈이라는 것은 하늘 위에 구름 어딘가 애매한 어딘가 부족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드는 설계도와 같은 것이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를 설계 설계해야 하고 나의 미래를 설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감점이 나에게 들어 올 때 나는 희망을 버리고 나를 설계를 시작하였다.설계를 한 순간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무작정 글을 쓰는 것이었다. 글을 쓰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글을 토해 내고 있었다. 내 안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들을 글로써 토해 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언제나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몸이 안 좋을 때 글을 써야만 하는 가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린 적도 많다.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다. 그렇지만 글 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더 나 같은 사람이 없음 하는 마음에 내 마음을 전달하려고 글을 쓰고 있다.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단 한 명의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때론 그런 믿음이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글 쓰기와 나와 같은 고통을 가져가고 싶다.


1999년 프랭크 다라본트가 감독한 ‘그린마일’ 이라는 영화가 있다. 시대 배경은 흑인이 핍박을 받던 시대의 영화인데 그 영화가 가장 감명 깊었던 장면은 흑인 죄인 하나가 남의 병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병을 대신 가져 가는 것이다. 약간은 말도 안 되는 내용이지만 그 흑인이 사형수이고 주연들은 그런 그 애가 사형되기 전 병을 가져가 주길 바란다는 장면이 나온다.


어릴 적 이 영화를 보곤 나도 남의 우울감을 가져가서 내가 대신 죽어 주길 바란 적이 많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긴 하다. 죽기 전에 남의 우울을 뺏아서 죽는 생각.


하지만 그런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는 생각만을 한 채 살아간다.차라리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면 좋겠지만.)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꿈과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남의 우울을 가져가기’ 보다는  자신의 우울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고 노력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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