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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시간, 무기력증

마음이 체했다

by 김이안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그동안 미뤄뒀던 그 길을 찾았다. 천변 공원 언덕, 벚나무가 양 옆으로 늘어선 길. 해마다 이맘때쯤 꼭 찾는 벚꽃길이었다. 이미 만개한 때가 지났는데 비까지 오고 나면 벚꽃이 다 떨어져 있을터.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칼퇴 후 서둘러 차를 몰았다. 다행히 하얀 분홍 빛 벚꽃들이 아직 나무에 남아 나를 반겨주었다.


찬찬히 벚꽃이 수놓은 풍경을 바라봤다. 머리 위로 핀 하얀 벚꽃. 길을 따라 쭉 이어진 벚꽃길. 벚꽃에 취해 걷다 보니 자연스레 고민들이 피어올랐다.


'왜 요즘 글을 못 쓰는 걸까. 왜 글쓰기 무기력증에 걸린 걸까.'


이렇게 물음을 던져보다가, 벚꽃을 보며 멍해지다가.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리다가 다시 꽃잎이 떨어진 길을 바라보다가. 걷고 듣고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득 든 생각,


'시간은 짧은데,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급하게 많이 읽으려 했구나'




책먹다 체했다


최근 도서관을 다시 이용하면서 책을 세 네 권씩 빌렸다. 2주 안에 다 완독 할 생각은 없었다.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볍게 훑어보고 마음에 드는 내용이 있으면 따로 메모 정도만 해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몇 번 펼쳐보지도 않고 대출할 때가 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왠지 내가 게을러서 책을 안 읽은 것 같은 자책감, 숙제를 다 하지 못하고 과제를 내는 찜찜함이 묻어 나왔다.


무인 대출반납기에 반납을 했다가 곧바로 재대출을 했다. 다시 2주가 연장된 것. '이번엔 좀 많이 읽고 반납해야지'라고 마음 먹으며 책들을 가방에 넣었다.


일단 빌리면 어느 정도 읽고 반납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느 정도'라는 기준도 애매하다. 4분에 1을 읽어도 부족한 것 같고, 절반을 읽어도 뭔가 아쉬웠다. 역시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건가.


속독에 집착하게 됐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은 많았다. 이 즈음에 가까이 지내는 팀원이 자기가 듣는 속독법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뇌를 써서 책을 사진 찍듯이 읽어서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며 독서하는 우뇌 독서법이라나.


속독에 관한 책을 나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은 책의 한 면 한 면을 대각선으로 빠르게 훑는 법을 강조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방법은 많은 양의 내용을 학습해야 하고 그 내용을 가지고 시험을 봐야 하는 상황에서나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주라는 시간 안에 세 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환경으로 나를 몰아가다 보니 속독에 집착하게 됐다. 빨리 읽어서 책을 어느 정도, 아니 다 읽었다는 그 느낌, 성취감을 맛보고 싶었다.


이게 문제였다. 타이트한 시간 안에 세 권의 책을 급하게 먹으려(읽으려) 하다 보니 마음이 체한 거였다. 체하면 배가 살살 아파 뭘 해도 집중이 안 된다. 마음도 마찬가지. 급체를 했으니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집중해서 뭔가를 써낼 수가 없다. 조급하니 사유할 수 없고, 그저 먹어치우는 데에만 급급할 뿐이다.




벚꽃은 진다. 시간은 정해져있다.


벚꽃이 흩날리며 떨어지면 예쁘지만 아쉽다. '벌써 떨어지네' '금방 지는구나'라고 내뱉는다. 하지만 벚꽃이 피어 나무에 맺혀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해져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일찍 일어나 아침 시간을 확보하고 오고 가는 이동시에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다 해도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은 늘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책욕심, 책허세를 버리자


아직 곱게 남아 있는 벚꽃과 길가에 흩날려 떨어진 꽃잎들. 이제 조금 있으면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벚꽃들도 떨어질테고, 하얀 꽃잎들도 사라질 거다. 벚꽃이 피어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기에.


가볍게 책을 훑어보고 반납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빌려왔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책욕심, 완독 욕심이 빌려온 책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빨리 먹어 치우고 싶어 한다. 읽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누군가에게 어떤 책 나 읽었다고 자랑하고 싶어 한다.


평생 독서에 몰두한다 해도 세상에 유명하다는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내가 읽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 역시 한계가 있다. 그러니 책을 읽을 때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은근히 과시하고픈 책욕심 또한 버려야 한다.


최근 지독하게 겪은 글쓰기 무기력증의 원인은 마음의 체, 그리고 조급함이었다. 조급함은 불안과 산만함으로 이어졌고 마음에 일어난 체는 사유하고 집중할 에너지 빼앗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벚꽃처럼 짧다. 그 안에 내가 읽고 싶은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또 책을 읽어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소화할 수도 없다. 그러니 조급함과 책욕심(책허세)를 버리고 내 속도에 맞게 읽을 것이다.


시간의 한계를 기억하려 한다. 어차피 다 못 읽는다. 어차피 다 이해 못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읽고, 사유하며, 글을 거다.


내 속도대로,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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