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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Oct 18. 2022

내 블로그를 아내에게 알리지 말라

자유로운 글쓰기를 원한다면


회전 초밥집에서 맛있게 초밥을 먹고 나왔다. 그런데 아내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최애 음식 서열 2위인 초밥, 그것도 나름 고급 회전 초밥집의 초밥을 먹고 난 얼굴치고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 블로그에 올린 글 봤어. 뭐? 창의성을 방해하는 인물 H? 그거 나지? 내가 진짜 어이가 없더라."



'내 블로그'라는 말을 듣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가상의 필명으로 일기 아닌 일기를 써 놓는 곳. 짧은 단상과 생각들, 그리고 독서노트들을 써 놓는 곳이 바로 블로그인데. 지금 아내는 분명 '내 블로그'라고 말하고 있다.



서둘러 기억을 샅샅이 뒤졌다. 창의성을 방해하는 인물? 얼마 전에 <아티스트 웨이>를 읽고, 거기에 있는 질문에 답을 달았던 걸 본 건가? 근데 그건 그만 쓴 지 거의 두 세 달 됐는데?



"내가 언제 자기가 뭐 한다고 한 거 못하게 말린 거 있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자기의 창의성을 막는 인물이라고 한 거야? 인생 헛살았지 내가."



계속되는 아내의 추궁에 점점 흐릿해지는 내 정신줄. 아, 나는 왜 하필 그런 글을 전체 공개로 해 놓았는가. 최소한 이웃 공개로만 해뒀어도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을.



참고로, 이 블로그는 나의 두 번째 블로그다. 첫 번째 블로그에 이런저런 글들을 하나둘씩 올리기 시작했을 때는 아내와 이웃을 맺었다. 또 가까운 지인들과도 이웃 추가를 하고 서로의 블로그에 들러 댓글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글을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에게 공개하는 게 불편해졌다. 글을 꾸준히, 자유롭게 써보려고 블로그를 시작한 건데 내가 무슨 글을 썼는지, 언제 글이 올라갔는지가 아내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오픈이 되니 마음껏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지인들 몰래 두 번째 블로그를 새로 만든 것이다.

 


물론, 아예 몰래라고는 할 수 없을 거다. 이제 첫 번째 블로그에는 글이 안 올라오니까 말이다. 아내도 내가 새로운 블로그를 만들었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했으리라. 그래도 혹시 내 두 번째 블로그를 찾아낼까 봐 블로그 명을 바꾸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몰라도 결국 내 두 번째 블로그를 찾아냈고, 그동안 내 짧은 생각과 일기 아닌 일기들을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 휴대폰 블로그 앱을 열어봤을 확률이 가장 크다..) 아내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그때 아마 뭔가로 싸운 후여서 그렇게 썼을 거라고 얘기를 했다. 그럼에도 아내의 화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내가 딱 보면 모를 줄 알아? 그 글은 화에 받쳐서 막 쓴 게 아니라. 상당히 차분한 정신상태로 쓴 거라고."



이런, 도대체 그동안 내 블로그를 얼마나 관찰(사찰!)해 온 건지. 물론 그때 내가 퇴사하고 잠깐 쉬면서 글을 쓰고자 했던 것과 관련해서 아내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기는 했다. 아마 그런 게 반영돼서 당시 아티스트 웨이 숙제를 할 때 일단 그렇게 적은 것 같은데. 문제는, 왜 나는 이걸 이웃 공개로 하지 않았냐는 거다. 아니다. 결국, 아내가 이 블로그를 보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는 게 이 사달의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블로그에 자유롭게 이런저런 글을 쓰는 글벗들이여, 블로그의 존재를 아내에게 알리지 말 것을 권한다.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글에는 어쨌든 내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블로그를 자유롭게 글을 쓰고자 하는 도구로 활용하길 원한다면 아내와 지인들에게는 되도록 오픈하지 말자.



혹시라도 아내가 서운해할 만한 글이 블로그에 떡하니 올라가 있다면, 그 글은 어느새 캡처가 되어 당신을 괴롭히는 증거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해명 작업은 오랜 시간과 많은 에너지를 요할게 너무나 뻔하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글쓰기를 누리고 싶은 그대여, 아내에게 내 블로그를 알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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