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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Feb 26. 2021

하염없이 걷고 싶은 밤

봄바람이 분다. 추억이 일렁인다.


하염없이 걷고 싶은 날이 있다. 15년 전 어느 봄날이 그랬다.



봄바람이 살랑 불었던 어느 저녁, 여의도공원. 좋아했던 선배에게 고백을 했다.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전하고 싶었다. 좋아했다고. 선배는 그 마음을 표현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선배에게 이미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당혹스러웠다. 한숨을 푹 쉬며 마음을 접어야겠다 했지만 그 마음이란 게 한 번 펴지니까 코팅한 것처럼 쉽사리 다시 접히지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결심했다. 그래도 일단 마음은 표현하자고. 좋아했다고 마음은 전하자고. 당신이 그만큼 내겐 설렘을 줬던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야 나 스스로에게도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맘때쯤 저녁시간 여의도공원에서 잠깐 볼 수 있냐고 문자를 보냈다. 1시간 일찍 여의도공원으로 향하면서 '그냥 전화로 얘기할 걸 그랬나?'하고 후회했다가 '아니야 그래도 이건 직접 말해야지'하고 다독였다가를 반복했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선배가 나타났다.



"이레, 너였구나..!"



"네 누나, 저였어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당시 핸드폰에는 발신자 번호를 숨기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기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번호를 숨기고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던 것. 번호를 숨기고 보냈던 문자 메시지의 내용은? 지금 머리를 쥐어 짜내고 짜내도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지금 보면 너무 오글거릴 그런 감성의 시 같은 문장들을 몇 개 보냈던 것 같다. '당신은 참 웃음이 예쁜 사람입니다' - 이런 류의 문장이었던 것 같다. 어우. (신은 이래서 망각이라는 선물을...)



그러나 당시엔 온 맘을 꾹 꾹 눌러 담은 그런 문장이었을 거다. 어쨌든 선배에게 이미 남자 친구가 있어도, 선배가 당신은 누군가에 설렘을 줄 만큼 좋은 사람이다. 예쁜 사람이다. 아름다운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이다. - 라는 걸 그 선배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정한 대망의 디데이 날, 여의도 공원에서 만나자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당연히 발신자 번호가 없었으므로 선배가 올지 안 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와도 좋고 안 와도 좋다고 생각했다. 설령 안 와도 익명의 문자메시지로 마음을 전했으니 혹 나인지 모르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생각했다.



또 만약에 선배가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나온다면 얼굴을 보고 얘기하리라 다짐했다. 그게 나였다고. 그냥 그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아아아, 그리고 이제 더 기억난다. 나는 그때 빈손으로 가지 않았다. 악기를 하나 가지고 갔다. 그리고 선배를 만나 어색하게 인사하고, 그리고.. 그리고.. 맞다. 나는 악기를 연주했다. 플루트였다. 대체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샘솟았는가. 다시 생각해도 실로 어메이징 하고 놀랍도다.



그러나 이 악기가 아예 생뚱맞은 등장은 결코 아니었다. 선배를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바로 플루트 동아리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무반주로, 솔로로, 플루트를 불었다는 것이다. 선배 앞에서. 기억을 더듬어 본다. 과연 나는 무얼 연주했나. 희미한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본다. 아, 아무래도 확실친 않지만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였던 것 같다. 봄이었지만 선배를 알게 된 내게 봄이 곧 10월이고 어느 멋진, 잊을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이레야 고마워, 이렇게 마음 표현해줘서"



그렇게 지하철역까지 선배를 바래다주고 나는 다시 공원으로 와서 하염없이 걸었다. 두 번 다시없을 용기를 내고 스스로 잘했다 토닥였지만 마음 한가운데가 벙 뚫린 기분이었다. '잘했어, 이제 후회는 없을 거야,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허하지..' 하며 하염없이 벚꽃이 피려는 여의도 윤중로를 걸었다.



사실, 오늘은 그것과는 조금 결이 다른 의미에서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 를 주 내용으로 쓰려했는데 이런, 15년 전 추억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 버렸다. 아무튼 그러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 15년 전 이맘때쯤에. 지금 돌아보면, 잘했다 싶다.



봄바람이 사른 사른 얼굴을 스치니 이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른 의미였다. 퇴사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나를 응원해준 S씨, 그리고 한결같이 따듯하게 함께해주시고 롤모델이 되어주신 M님과의 만남 후에 마음에 감사함이 일어 글을 적기 시작했는데, 뭐 아무래도 좋다.



가끔 삼천포에도 빠지고 뜬금없는 마무리도 되는 게 인생 아닌가. 그래서 또 삶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나. 봄바람이 살랑거린다. 내 마음도 일렁인다. 잊지 못할, 또 하나의 봄 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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