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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Jun 12. 2023

김이레씨 정신 차리세요

결과에 대한 평가와 압박


"김이레 씨, 정신 차리세요. 실적 떨어지지 않게 신경 써야 합니다."



좀 놀랐다. 물론 지난주 대비해서 실적이 많이 줄긴 했다. 그렇다 해도 아직 새로운 부서를 인계받은 지 이제 2주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압박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주변에서는 직급은 같더라도 어찌 보면 승진한거나 다름없다고 얘기한다. 규모가 더 큰 부서를 맡은 거고 다른 관련 부서들도 간접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역할을 하게된 거니까. 물론 이에 따른 책임도 더 커질 거라 예상은 했다만, 이렇게 빨리 압박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이런 게 평가받는 삶이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대표님의 초조함과 불안함이 느껴졌다. 지난 3년간 잘 성장해 온 부서. 그러나 담당자는 그간 대표님에게 세 번이나 사임의사를 밝힌 끝에 지난 5월 회사를 떠났다. 시기가 어중간한 만큼 후임 담당자는 구해지지 않았고 별 수 없이 나를 일단 임시 담당자로 세웠던 거다. 그런데 실적이 지난주 눈에 띄게 줄었으니, 후임 담당자인 나를 몰아붙인 거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가 좋으면 감사하고, 결과가 안 좋으면 그게 내 한계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부임 초기 나 스스로 다짐했던 마음가짐이다. 그런데 막상 실적에 대한 쓴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으니 생각보다 데미지가 좀 있다.



이날 집에 돌아와 주말에 열린 K리그 축구 경기 하이라이트를 챙겨봤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울산이기에 울산과 제주의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는데 이날따라 경기 중간중간 화면에 잡힌 각 팀 감독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감독들도 매주 결과를 바로바로 평가받는 나와 같은 처지구나.' 동질감을 느꼈다.



경기는 울산이 다섯 골이나 넣으며 화려하게 승기를 가져갔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멋진 골장면보다 다섯 번째 실점을 한 뒤 착잡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제주 남기일 감독의 얼굴이 어찌나 마음에 강렬히 남던지.



울산과의 경기를 위해 제주는 일주일 전부터 영상자료로 상대팀의 전술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전술을 준비하며 훈련했을 거다. 더구나 울산은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팀이니 더욱더 신경 써서 치밀하게 훈련하고 준비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주는 울산에게 대패했다. 그리고 이 매정한 결과는 당시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 뿐 아니라 중계로 경기를 시청한 이들에게까지 가차 없이 전달되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경기 후에도 각종 미디어와 인터넷 기사로 이 결과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정말 잔인하리만치 바로바로 결과와 실적을 평가받는 직업이 축구팀 감독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지금 내가 겪는 실적에 대한 압박과, 실적을 올리는 도구로 취급되는 씁쓸함이 좀 가라앉았다. 주어진 기간까지 내가 이 자리를 계속 버티며 감당해갈 수 있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직장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 결과에 대한 평가와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나는 과연 잘 버티며 이겨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결과에 대한 압박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지키며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손흥민은 지난 4월, 프리미어리그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압박감마저 즐겨보려 한다"라는 말을 남긴 적 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사람조차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에, 그 압박감마저 즐겨보려 한다는 게 인상적이다. 나는 즐기는 경지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은 채 잘 이겨가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초심을 다잡아 본다. 최선을 다한 뒤 결과가 좋으면 감사하고, 결과가 안 좋으면 그게 내 한계라 생각하고 겸허하게 수용하기로.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는만큼만 하고 스스로에게 당당하면 된다고. 



대표님, 덕분에 정신 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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