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잠들기 전 15분

by 김이안


침대에 누워 스탠드를 켜고 책을 펼친다. 잠들기 전 10분에서 15분, 잠시 글자와 문장의 숲을 거닌다. 이때 나는 잠시 다른 세계를 구경하며 그 안에 머문다.



잠들기 전, 이 잠깐의 시간이 나를 구원한다. 해야 할 많은 업무들이 결코 나를 규정할 수 없음을 상기한다. 읽고 상상하고 몰입하며 나는 자유롭다. 이 몇 분의 시간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10분, 15분, 20분. 자투리 시간이지만 이 몇 분이 한 주 두 주 쌓이니 꽤 많은 분량의 양을 읽게 된다. 2주 전부터 잠들기 전 읽기 시작한 책 <모비딕>. 업무에 이리저리 치이고, 뭐 하나 제대로 읽지도, 쓰지도 못한 하루가 아쉬워 매일 밤 몇 분씩 읽었더니 어느덧 600페이지에 이르고 있다.




허먼 멜빌. 이 사람은 정녕 고래에 미친 사람인가. 소설은 어쩔 수 없이 작가의 여러 가지 삶의 경험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지만, 그럼에도 <모비딕>에서는 너무 많다. 고래에 대한 이러저러한 잡학 지식들이. 고래 지식 총망라 대백과사전을 읽는 건지 소설을 읽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렇지만 신기한 게, 지루한 이 내용들을 나도 모르게 빠져들며 읽고 있다는 것. 재미없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읽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물론 어떤 부분, 예를 들면 경뇌유(고래 머리에서 나는 기름)를 추출하는 방법을 지나치게 장황히 설명하는 내용들을 읽을 땐 눈꺼풀이 금세 무거워져 꿈나라로 직행하기도 했다.(모비딕이 벽돌책이 되게 한 주범은 바로 이 고래와 관련된 방대하고 세세한 서술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고래 이야기, 그리고 이와 맞물려 진행되는 피쿼드 호의 항해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짧게나마 나는 대서양 바다 어느 한 구석에 있다 온 느낌이 든다.





머릿속에 무언가 맴도는 게 있지만, 써 내려가고 싶은 게 있지만, 자고 일어나 출근하기 바쁠 때 내 마음은 헛헛하다. 뭔가는 쓰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때,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조각 글들이 쌓여만 갈 때 마음에 작은 응어리가 생긴다.



햇볕을 못 받은 화분처럼 시들시들해지기 싫어서, 공허하고 건조한 마음으로 잠들기 싫어서, 잠들기 전 15분은 책을 읽는다. 문장의 욕조에 몸을 담근다. 그나마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짧은 몇 분. 이 시간 덕분에 나는 희미하게나마 생기를 다시 머금는다. 잠시 자유로워진, 또 다른 내 모습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