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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꽃, 그리고 앤

by 김이안


요즘 나의 제철 행복, 꽃사진 찍기. 아침이든, 점심 때는, 늦은 오후든 하루 중 꽃 사진을 하나라도 찍은 날엔 작은 만족감을 느낀다. 휴대폰에 저장된 꽃 사진들을 돌아보면 오늘 하루, 잘 살았다는 한 뿌듯함도 든다.



예전엔 길을 가다 꽃 사진을 찍을 때, 스스로 좀 쑥스러운 게 있었다. 인 남자가 꽃 사진을 심히 찍는 게 일반적인 건 아니니까. 그래서 찍기 전 괜히 주변을 좀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누가 볼 새라 후다닥 찍고 마치 원래 가던 길 가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주변을 그렇게 의식하지 않게 됐다. 이젠 찬찬히 꽃을 바라보고 꽃 앞에 머문다. 이리저리 도를 바꿔보기도 하고, 핸드폰 렌즈에 담기는 빛의 양을 조절해 가며 사진을 찍는다. 여유 있게. 스스로 좀 당당해졌다고나 할까.





이렇게 된 데에는 책 <빨강머리 앤>의 영향이 컸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빨강머리 앤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란 내용의 콘텐츠를 보게 됐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빨강머리 앤>은 관계에 있어서 사람의 근원적인 세 가지 불안과 그에 대한 극복을 다루고 있다는 것. 그 세 가지 불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유기불안. 둘째는 또래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할지 모른다는 관계 불안. 셋째는 이성관계에서 사랑받지 못할 수 있다는 이성관계에서의 불안. 앤은 이 세 가지 불안과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아름답게 성장해 나간다. 그래서 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새 힘을 준다는 이다.





작년에 장거리 운전을 꽤 하게 될 일이 생겨서 오디오북으로 <빨강머리 앤>을 저 들었다. 귀로 책을 읽으며, 그동안 <빨강머리 앤>을 아이들이 보는 동화 정도로 생각했던 걸 깊이 회개(!)했다.


아, 어찌나 몰입하며 들었는지. 앤이 이렇게 생기 넘치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였구나. 앤의 싱그러움과 긍정적인 에너지에 서서히 내가 물드는 것 같았다. 앤을 '감탄소녀'라고 부를 정도로, 앤은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고, 향유할 수 있는 아이였다.



이러한 '앤'이라는 캐릭터가,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마음에 어떤 흔적 혹은 무늬를 새기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길가에 핀 꽃들을 작은 감탄과 경이로움으로 바라볼 때만 앤이 떠오른다. 자주 감탄하는 게 곧 행복이라는 걸 앤이 깨닫게 해 주었다.



"저기, 가로수 길은 예쁜 곳이지."


"예쁘다고요? 단지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아름답다는 말도 안 돼요. 음 그곳은 환상적이에요. 상상으로 더 훌륭하게 만들 수 없는 곳은 처음 봤어요. 가슴이 이상하게도 아픈데 기분 좋게 아파요. 저 아름다운 곳을 가로수 길이라 부르면 안 돼요. 제 생각엔, '기쁨의 하얀 길'이라고 불러야 해요."


_ <빨강머리앤> 43p





꽃 앞에서 아름다움과 생기를 느끼고 감탄하는 나를 좋아하기로 했다. 앤 덕분이다. 오늘도 나는 꽃 앞에서 잠시 멈출 것이다. 꽃을 발견하고, 시선을 둔다. 핸드폰을 꺼내 구도를 잡고, 포커스를 맞춘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찰칵





정말 멋진 날이야! 이런 날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니? _ <빨강머리 앤> 1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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