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아놓은 작업용 코팅 장갑과 팔토시를 챙겼다. 아침 공기는 선선했고 햇살은 부드러웠다. 도로 위가 한산했다. 당연했다. 오늘은 추석을 앞둔 연휴였으니까.
명절 연휴인데 출근을 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이번 연휴 때 출근하는 대신 나중에 똑같이 3일을 쉴 수 있도록 대체 휴일을 지급한다고 공지를 내렸다. 이렇게 공휴일도 나중에라도 쉴 수 있게 보장한다는 게 이 회사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그럼에도 휴일에, 그것도 명절 연휴에 출근을 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당연히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명절 연휴. 평소 왕래가 없어도 이때는 함께 식사를 하며 친척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라 생각했던 연휴. 그간 명절에도 일한다는 것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막상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 나니 약간의 소외감과 씁쓸함이 느껴졌달까.
출근하고 나니 이미 배송할 물건들을 분류하고 하나 둘 싣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출근길에는 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막상 도착해서 같은 조 조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늘 배송할 물품들을 분류하기 시작하니 이내 작업에 집중하게 됐다.
오늘 내게 배정된 구역은 총 12구역이었다. 아파트 단지 두 구역, 일반 지번 주택 여덟 구역, 나머지 두 구역은 상가 쪽이었다. 그래도 전체 물량이 평소보다는 적은 편이다.
분류와 적재를 마치니 오전 11시. 오늘 물건을 받아볼 고객들에게 배송시간 안내 문자를 보낸 뒤 운행을 시작했다. 오늘 목표도 역시, 다른 조원들의 도움을 안 받고 내게 주어진 물량을 시간 안에 다 배송하는 것.
101곳의 집에 181개의 물건. 잘하면 쉐어를 받지 않고도 나 스스로 끝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정말이지 1분 1초를 아끼고 효율적인 동선으로 움직여야 한다.
역 근처 쌀국수 식당에 첫 배송을 마친 뒤 빌라 건물로 이동했다. 이 건물에선 총 세 집이 일곱 개의 물건을 주문했다. L자 카트에 물건을 싣고 업무폰에 나온 공용 비밀번호를 입력해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다. 신속하게 들어가 먼저 '닫힘'버튼을 먼저 누르고 2층, 5층, 7층을 누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배송 물건을 문 앞에 두고 사진을 찍고 배송 완료를 터치하면서 신속하게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다. 이게 핵심 스킬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 재빠르게 이루어져야 동작이다.
7층에서 실수가 있었다. 물품이 가볍고 한 손으로 들 수 있으면 물품을 문 앞에 내려놓는 동시에 사진을 찍고 배송 완료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배송 물품이 많거나 무거운 경우 두 손을 다 써서 옮겨야 하기에 물건을 내려놓은 다음 조끼 주머니에서 업무폰을 꺼내 배송 완료 처리 작업을 해야 한다. 주머니에서 업무폰을 꺼내는 1-2초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이 몇 초로 인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 나를 놔두고 내려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7층에서 바로 그 재앙이 일어났다. 물품이 여러 개여서 혹시 몇 초가 더 지체될 것 같아 L자 카트를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세워놓았다. 평소 이렇게 해놓으면 문이 닫히지 않기에 엘리베이터를 붙잡아 둘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촬영한 사진이 흔들려 재촬영 알림이 떴고 다시 사진을 찍고 배송 완료를 처리하니 시간이 좀 지체됐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카트를 세워놓길 잘했다 싶었으나 뒤돌아 보니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있었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계단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다고 엘리베이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이미 엘리베이터를 놓쳤으나 시간 지체를 하면 안 된다는 다급함이 어느새 몸에 배어서 그렇게 움직인 것 같다.
빠르게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띵동, 5층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 층을 더 내려가서 5층 라인 계단 문을 여니 여자분 한 분이 엘리베이터를 막 타고 있었고 그 안에 카트가 보였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이 분 덕분에 운 좋게 놓친 엘리베이터에 다시 탈 수 있었다. 카트를 세워놓는다고 세워놨으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카트를 안쪽으로 끌고 가면서 닫힐 때가 종종 있는데 바로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카트를 조수석에 싣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오전에 역 근처 상가와 지번 주택 단지를 배송하고 나니 오후 2시가 되었다. 2시부터 3시까지는 휴게시간이다. 이 시간을 이용해 점심을 먹는다. 작은 우체국이 있는 어느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냈다.
배송물품을 분류하고 적재하고 배송할 때는 집중하느라 잠시 잊었는데 다시 약간의 씁쓸함이 밀려왔다. 명절 연휴인데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하는 이 상황에 대한 씁쓸함. 분명히 나중에 오늘 못 쉰 휴일을 쓸 수 있다고는 하나 명절에 나만 따로 떨어져 나와 이렇게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서글픔이 베어 나온다.
그런 찰나에 업무 단톡방에서 메시지가 떴다. 신선식품 추가 배송을 위한 중간 집결이 새로 지정된 장소에서 15분 후에 있을 거라는 안내 공지였다. 부랴부랴 남은 밥을 먹고 자일리톨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점심 전 마지막 배송을 끝내고 난 위치가 집결지와 가까워 네비에 5분 소요 예상이라고 뜬다.
출발하기 전 차 안에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 중간중간에 구름이 한 움큼씩 떠다닌다. 아내와 아이, 그리고 명절이면 만났던 친척들을 잠시 떠올리다가 시동을 켜고 추가 배송 집결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