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른봄 Dec 20. 2020

기록은 기억을 만든다

  사는 게 뭐가 그렇게 바쁜지 몇 년 만에 컴퓨터 파일을 정리했어요. 노트북 하드에 가용 공간이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반복해서 떴거든요. 마음먹은 김에 해치우자 싶어 급하게 외장하드를 주문합니다. 용량이 큰 폴더는 대부분 사진과 동영상이 들어 있는 것들이었어요. 10여 년에 걸쳐 찍기만 하고 쌓아 두었던 어마어마한 양의 사진들이 오랜만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는 동안 나는 점점 앳되어지고, 아이들은 한 살 한 살 어려지다 못해 누워만 있는 아기가 되었어요. 웃을 때는 함박웃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또 울 때는 눈물 뚝뚝 서러움이 예뻐서 참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네요. 자주 들여다볼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도 열심히 시간을 박제해 두었던 걸까요.           



  재미있는 건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정말 매일매일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말이죠. 하긴 100일 무렵까지는 출생 몸무게의 두 배가 되도록 자라는 시기니 아기들이 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사진 찍는 재미가 있었을 거예요. 신생아라 잠을 많이 자고, 대부분 누워 있으니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기도 했을 테고요.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며칠에 한 장, 1-2주에 한 장으로 사진 수가 줄어들더니 최근 앨범에는 사진보다 화면 캡처가 더 많아졌어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거나 줄어든 것은 아닌데 말이죠.           



  여행을 가거나 기념일같이 특별한 날에 우리는 꼭 사진을 찍습니다. 그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으니까요. 지나고 보면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관광보다 사진 찍기에 열을 올리는 어른들 말씀은 일리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찍지만 또 사진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 순간은 기억 속에 살아남아 특별하게 저장되기도 하니까요.          



  나는, 우리 삶은 평범해서 기억에 남지 않는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집니다. 쇠털 같이 많은 날, 모래알 같이 많은 날이라는 관용구를 굳이 빌려오지 않아도 비슷비슷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해변에 가면 비치파라솔, 가지각색의 튜브와 비치볼, 하다 못해 뒹구는 소주병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정작 한 알 한 알의 모래가 없으면 백사장이 될 수 없겠지요.   


        

  특별한 이벤트 없이 지나가는 하루를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년 만에 눈싸움에 신난 아이들의 웃음도 잊지 않고 싶지만 뒹굴뒹굴 만화책을 보는 오후나 레고 놀이에 열심인 순간도 해변의 모래 한 알 이니까요. 보통의 순간을 더 많이 남겨두어야겠습니다.           



  나를 위해서도 시간을 내보려고 해요. 원래 일기도 잘 쓰지 않고 다이어리도 써 본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틈틈이 기록을 남기려 노력하고 있어요. 찰나에 스치는 단상이나 찾아봐야겠다 싶은 것들을 적어두기도 하고요.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서 만든 나를 가끔씩 들여다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오랜만에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그땐 그랬지 하면 웃었던 오늘처럼, 50살의 내가 마흔의 또 마흔다섯의 나를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전 03화 딸과 아들을 평등하게 키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