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언제 이 문장을 처음 들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중고등학교 영어 수업 시간이었거나, 독서평설 같은 잡지의 쉬어가는 페이지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천천히 가도 꾸준하다면 경주에 이길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지만 살면서 저 문구를 실감할 만한 순간은 없었다. 내가 토끼 입장의 능력자라 거북이를 이해할만한 경험을 하지 못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범사에 중상 정도에 낄 수 있는 능력치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꾸준함이다. 과거의 나는 거북이와 같은 답답할 정도의 꾸준함이 없었던 탓에 상대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경쟁 상대는 옆자리 아이가 아니라 놀고 싶고 자고 싶은 나 자신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나도, 아마 당신도. 학원만 등록하고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때려치우기를 반복했던 영어 공부가 그랬고, 셀 수 없이 도전했지만 15년째 제자리인 다이어트도 그랬다. 이 나이에 그 정도면 괜찮다는 정신승리도 승리라면 수확이겠지만.
사실 시작만 해 본 일은 끝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다. 도자기 공방, 요가, 종이접기 자격증 과정, 수영, 메이크업 강좌, 인문학 강의 등등. 등록 후 출석은 두세 번에 그쳤던 것도 부지기수였음이 부끄럽다.
이런 시작의 역사를 가진 내가 꾸준함으로 결국 해내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경험 혹은 성취가 아니라 목격인 것은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고 아이의 성공 과정을 지켜만 보았기 때문이다. 올해 초 아이에게 줄넘기를 가르치면서였다. 한국에서는 학교나 태권도장에서 자연스럽게 줄넘기를 배울 기회가 있지만 해외 체류 중이라 외부 도움을 받을 수 없기에 직접 가르쳐야 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줄넘기는 팔로 줄을 돌리면서 박자에 맞추어 점프하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동작의 반복이다. 그러나 8세 아이에게 그 동시 동작은 영어 작문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뭐든 잘하고 싶어 하는 아이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양발 뛰기 한 개를 성공하기까지 두세 번 눈물을 보였다. 함께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아이를 어르고 달래 매일 한갓진 아파트 공터를 찾아 격려했지만 사실상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말 뿐이었다. 머리와 몸의 협응은 동작의 반복을 통해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것이니 엇 박으로 뛰는 아이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연습한 끝에 아이는 자기 리듬에 맞춰 뛰기 시작했고, 한 개의 성공은 며칠 지나지 않아 2,30개로 이어졌다.
신난 아이는 100개, 200개, 300개 연속하기라는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연습했다. 딸아이가 양발 뛰기 500개를 성공하고 팔짝팔짝 뛰던 날, 내 가슴도 함께 벅차올랐다.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쁨도 있었지만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보면서 계속하면 진짜 된다는 것을 목도한 감격도 컸다. “한 개 못 넘어서 울었던 거 기억나?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라는 말 들어봤지? 너를 보면서 엄마는 그 문장을 진짜로 이해하게 됐어.”
양발 뛰기가 가뿐해지자 아이는 가위 뛰기, 뒤로 넘기를 연습했고 마지막으로 2단 뛰기에 도전했는데 이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반복해서 보았던 유튜브도 어느 순간부터는 소용이 없었다. 어찌어찌 한 개는 성공하는데 줄을 넘는 순간 자꾸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1단 뛰기도 100개를 겨우 넘는 처지라 앉지 말고 발을 앞으로 뻗어보라는 유튜버의 설명만 되풀이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바로 어제, 놀이터에 나간 아이가 마스크도 벗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 들어왔다. “엄마, 나 2단 뛰기 3개 성공했어. 드디어 했어!”
나에게도 분명 처음으로 양발 뛰기를 하고, 10개, 100개 넘기에 성공하던 날이 있었다.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운동신경으로 보건대 쉽게 성공했을 리 만무하다. 줄넘기뿐만 아니라 시간을 들여 연습으로 터득한 기능들은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꾸준히 하면 해낼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관찰자가 되어서야 진심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steady라는 단어를 곱씹게 만든 것은 고작 줄넘기였다. 그러나 딸의 줄넘기는 꾸준함의 힘이 사실은 모든 도전과 성취에 적용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수없이 변주되는 TV 속 누군가가 맞이한 영광의 순간과 숱하게 시작만 하다 끝난 내 실패의 시간들이 대비되는 지점에, 결국 비밀은 꾸준함이었다는 간단하여 허탈한 결론이 남았다.
우리는 다시 도전하게 될 테고 또 벽에 부딪히는 순간을 맞을 것이다. 그때가 오면 아이들에게 다시 일러주고 싶다. “아무래도 거북이는 알고 있었던 거 같아. 토끼와의 내기였지만 결국 넘어서야 하는 상대는 자기 자신이라는 걸 말이야. 사실 살면서 반드시 토끼를 이겨야만 하는 경주는 많지 않거든.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서 언덕에 오르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 나를 빠른 속도로 지나쳐가는 수많은 토끼들을 보면서 좌절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면 언젠가는 언덕에 오르게 된다는 거, 거북이의 비밀을 잊어버리지 마.”
참, 나에게는 딸보다 2살 어린 아들이 있다. 막 양발 뛰기를 성공한, 2단 뛰기 성공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딸 옆에서 부러움의 눈물을 글썽이는. 이번에는 아들에게 꾸준함의 마법을 경험하게 해 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