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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Dec 15. 2020

존재의 증명은 어려워

  지갑 정리를 하다 홍콩에서 발급받은 아이디카드가 나왔다. 분실한 후, 몇 주를 고민하다 혹시나 하는 이방인의 걱정으로 재발급을 받았다. 이민국의 긴 대기 시간과 재발급비용 5만 원을 지불하고 새로 받은 아이디카드는 홍콩을 떠나던 날 출국장에서야 처음 지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제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많지 않다. 내가 올 한 해 실물 신분증을 제출했던 순간은 은행 창구에서 직원과 마주 앉았을 때, 신규 카드를 수령하던 날 신분증 발급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서, 공항에서 여권 속의 인물과 내가 동일인임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의 반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정도가 전부이다. 



  한국을 떠나 있는 사이 인터넷으로 처리할 수 있는 민원 업무가 훨씬 늘었고, 유용한 사이트와 앱이 많이 생겼다. 이 모든 편리함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회원가입과 본인인증이라는 필수 관문을 지나야 한다. 휴대폰 가입을 시작으로 해외이사, 전입신고와 전학 처리, 각종 집기를 구입하고 배송받기 위해 하루에도 십 수 번을 같은 작업에 시간을 쏟아야 했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휴대폰으로 날아온 인증 문자를 입력하고, 아이핀, 공인인증서 제출을 요구받았다. 때로는 지문 확인을 위해 엄지를 문질러 로그인하려는 이가 틀림없는 나임을 확인시켜야 했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들이 자주 그러하듯 생각 없이 치르던 자동적 의식이 순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인증과 관련해서는 비밀번호를 입력할 기회가 두세 번밖에 남지 않았을 때, 로그인이 계속해서 튕긴다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의 팝업창이 반복해서 뜰 때가 그랬다. 하라는 대로 해도 안 되면 뭘 더 어떻게 내 존재를 증명하란 말인지. 처음에는 짜증 섞인 난감함이 다음에는 정체모를 불안함이 밀려왔다. 저들이 원하는 적절한 개인정보를 제공할 수 없을 때, 제출했음에도 오류가 발생할 때 나는 나로 존재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다. 주민등록등본이나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는 건 당연하고, 저녁거리를 주문하거나 시시껄렁한 개그프로를 보며 시간을 때우는 지극히 사소한 일도 할 수 없다. 마트에 가거나 티브이를 켜면 될 일인데 존재의 증명까지 운운하며 심란해하는 건 너무 멀리 간 건가.      



  그러나 다시 고민해보지만 불안을 가볍게 치부하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일상을 스마트 폰과 공유하고 있다. 은행, 증권 업무 같은 굵직한 것에서부터 웹툰 보기와 bts 덕질 같은 취미생활 까지. 어쨌든 크던 작던 대부분의 작업은 로그인으로 시작되는데 심지어 자동 로그인 기능을 사용하니 각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조합을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나의 불안은 단지 로그인을 거절당해 일처리가 늦어지는 데서 오는 일차원적 감정은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 바닥에는 이 작은 기계가 내 손에서 사라졌을 때 함께 증발해 버릴지 모를 평범한 일상이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휴대폰을 택시에 두고 내렸다면, 결국 찾지 못했다면? 오, 이런. 얼른 눈에 잘 띄는 크고 빨간 수첩을 꺼내 새로 만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몽땅 적는다.   



  그나저나 도서관 가족 회원가입을 위해 받은 아이핀은 계속 오류가 뜨고, 똑같은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결국 회원이 될 수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제냐. 에라이, 내가 나 맞다고 카메라에 주민등록증이라도 들이밀고 싶어 지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이만큼 늙어가는 컴퓨터 활용 능력이 문제인 걸까. 벌써 그 정도로 나이가 들어 버린 것이면, 얼른 신분증 사진이라도 최근 것으로 바꾸어 놓아야 하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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