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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Dec 18. 2020

몸이냐 정신이냐

  ‘정직하게 살자’는 우리 집 가훈이었다. 아버지의 큰 뜻이나 집안의 숨겨진 아픔이 담긴 문장은 아니고, 가훈 알아오기 숙제를 위해 아버지가 즉석에서 불러주신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자식들이 거짓말하지 않도록 강조하며 키우셨으니 아주 없는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써서 벽에 붙여 두지 않았고 급조하셨을 뿐이다. 당시 아이들이 노트에 적어 온 가훈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것들이었는데, 한 친구는 멋들어진 서체로 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고 써 왔다. 정신을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던 그 아이의 발표를, 정말 그럴까 하고 삐딱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가훈, 급훈, 교훈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가르침이 될 만한 글귀를 마음에 담고 닮아가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좋은 취지였으리라 생각한다.           



  마음에 새겨야 할 것들이 참 많았던 학창 시절, 정신력이니 의지니 하는 무거운 단어들을 일상적으로 강요받았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학교에서 정신교육을 담당하는 분은 주로 체육선생님들이었다. 오리걸음, 쪼그려 앉아 계단 오르기, 걸상 들기 등 단체기합을 받으면서 주로 들었던 말은 정신이 해이해졌다, 정신력이 제일 중요하다, 정신 통일과 같은 다그침이었다. 건강한 몸과 운동능력 향상을 담당하는 체육 선생님들이 자주 언급하셨던 주제가 “정신”이라니 아이러니하다(체육 선생님들이 포커스는 아니다. 옳건 그르건 체벌이 자연스러운 때였고, 나는 선생님들의 조언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학생이었다).          



  오늘 갑자기 정신력에 관한 생각이 든 것은 몸이 좋지 않아서였다. 운 좋게 병원에 입원하는 큰 병 없이 살아왔지만 나는 오래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다. 체기가 느껴지는 때는 부지기수고, 두어 달에 한 번은 수액을 맞아야 할 정도로 먹지 못하기도 한다. 심하게 체하면 두통이 너무 심해 머리를 뽑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럴 때는 아이들도 하루 종일 엄마를 찾지 않고 알아서 숙제를 하고, 다투지 않고 놀고, 뒷정리를 한다. 일종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 셈이니 쉰다는 핑계로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머리를 쥐어뜯고 통증을 줄여보려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식은땀을 쏟으며 두통이 멈추기를 기다릴 때마다 나는 육체의 고통에 완벽히 지배당하는 정신의 하잘 것 없음에 씁쓸해하고는 한다.      

  


  건강한 몸은 정신의 전당이고, 병든 몸은 정신의 감옥이라는 베이컨의 말을 떠올려 본다. 집 격인 몸이 부실한데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정신이 튼튼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정신보다 몸이 우선이라는 말 같지만 그만큼 신체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편이 옳다. 몸과 정신은 나를 이루는 양 축이고 둘을 분리하여 우위를 정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양자의 균형이 조화로울 때 진짜 건강할 수 있다는 뻔한 정답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다만, 수시로 정신력을 강조하던 십 대 시절과 어떤 주제도 기승전 운동과 건강으로 마무리되는 지금의 현격한 차이에 웃음이 날 뿐이다.      



  이제 누구도 나에게 농담일지언정 정신 차리라, 정신 줄 잡으라는 무시무시한 말 같은 건 건네지 않는다. 여전히 내 안에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아들의 다툼이 있고, 마음이 갈팡질팡 헤매는 순간들이 수시로 생기지만 말이다. 어느새 내게도 네게도 쉽지 않은 조언 대신 서로 몸 잘 챙기라는 말을 인사로, 덕담으로 주고받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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