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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실 Sep 25. 2021

한강에서 기른 맨땅에 헤딩력

02_해결법을 찾을 때까지 무작정 부딪히기

처음부터 기획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 아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부딪친 현실은 꽤 막막했습니다. 흔한 복수 전공 하나 하지 않은, 4년 내내 순수 문학과 씨름했던 저에겐 어느 회사의 어떤 직무도 딱 맞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경영학과를 졸업해서 서류 합격도 잘 되는 걸까, 내가 괜히 취업이 안 되는 학과를 간 건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어떤 대상을 찾아 탓하게 되죠. 그 대상은 머지않아 제 자신이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회의, 실망, 자기 비난 등 등.... 대학교 4학년부터 졸업 후 1년, 총 2년 정도가 제 인생에서 가장 우울감이 극심했던 때였습니다.


'내가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동이 트고도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습니다. 당시 우울과 불안 증세가 극심해져 집 밖을 나가질 못했고, 집을 나가도 땅만 보고 길을 다녔죠. 어쩌다 버스를 탄 날은 모든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듯한 시선(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에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공황장애를 경험했습니다.


이 날 집에 와서 펑펑 울며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고, 부모님께서는 제 걱정에 대구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기는 중대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 몇십 년 사셨던 곳을 '나로 인해' 떠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한동안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족들이 없다면 이겨내기 힘들 정도로 절벽 끝에 서 있었습니다. 예전처럼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불효를 만회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가족과 함께하게 되면서 저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하루하루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며 다양한 회사에 지원을 했습니다. 원서를 넣고 떨어지길 반복하던 어느 날, 대학교 동아리 선배 한 분이 인턴 모집을 하는데 생각이 있으면 지원을 해보라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구와 기업이 서로 지원금을 보조해주고,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협약을 맺은 인턴십이었습니다.


여러 기업들 중에서도  눈에 들어온 것은 '문화기획'이었습니다. 단어가 주는 흥미로움에 이끌려 공고 마감 하루를 앞두고 자소서를 써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서류 합격 후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첫 면접이라는 긴장감에 몸이 떨려서 가만히 있는 게 더 고역이었죠. 세 명의 지원자가 동시에 면접을 보는 다대다 면접이었습니다.


첫 번째 순서로 자기소개를 하게 된 저는 어떻게 말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똑소리 나는 다른 지원자의 발표를 들으며 '망했다'를 속으로 외쳤죠. 직무와 비슷한 경험을 말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일 경험이 없는 저는 떨어졌다 싶었습니다. 터덜 터덜 집으로 도착한 지 1시간 뒤쯤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자존감이 낮았던 당시 '나에 대한 가능성' 확인함과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무개' 삶에서 벗어났다는 현실에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첫 출근 날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이었습니다. 저는 회사에 출근하는 대신 당시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 미팅에 곧장 참가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기합이 바짝 들어간 상태였죠.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모든 내용을 받아 적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의 한강 사업부에서 주관하는 '한강 몽땅 축제'였는데요, 한강에서 진행하는 여러 행사 중 일부를 각기 다른 콘셉트로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입사 전에는 감이 잘 오지 않았던 '문화기획'은 말 그대로 '문화를 기획하는 일’로, 공공기관 혹은 민간 기업의 축제와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이었습니다. 더 쉽게 말하면 행사 운영을 대행하는 회사였습니다. 제가 일했던 회사는 대표님의 신념에 따라 역사적,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행사를 기획하는 일에 중점을 뒀습니다. DMZ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축제를 열고, 탈북민과 함께하는 행사를 진행하는 등 사회적 의미가 있는 행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이 한강 몽땅 축제처럼 공공기관과 계약을 맺는 행사가 주를 이뤘습니다.


한강 몽땅 축제는 당시 회사에서 진행하는 축제 중 규모가 가장 큰 편이었습니다. 각 행사에 1~2명의 매니저가 붙었음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넘쳐났죠. 한강에서 진행하는 축제이니 업무의 반은 현장을 돌아보고 기획을 점검하는 일이었습니다. 무대 설치가 필요한 경우 무대설치팀, 후원사가 있는 경우 후원사의 마케팅팀, 조명과 음향팀, 그 외 각종 팀들과 함께 미팅 때마다 한강의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매일매일 '한 축제가 이뤄지기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는구나' 충격과 감탄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인턴이었기에 각 PM(Project Manager)분들을 도와드리는 보조 업무를 했는데, 그들의 업무량을 보고 기함을 토했습니다. PM은 협력사를 포함한 축제의 모든 진행사항을 알아야 했으며, 그 사이에 발생하는 여러 집단에서의 갈등 또한 조율해야 했습니다.


저는 인턴인데도 체력이 금방 바닥났습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몇 년씩 하고 계시고, 꿋꿋하게 일을 진행하시는 매니저님들을 보며 경이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  일을 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이렇게 힘든데 '일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입사 후 2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축제에 매달리면서 저는 심적, 체력적으로도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일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일을 하면서도 방황하고 있었죠.


그러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맡았습니다. 이전까지는 계약서를 집행하는 등 행정적인 일을 맡거나 축제에 필요한 물품을 검색하는 일을 주로 했다면, 이번에는 축제 시 승객들을 태워 운행하는 버스 운영을 맡게 되었습니다. 관광버스 같은 대형 버스 말이죠!


버스를 타기는 많이 탔어도 운영을 해 본 적은 없는지라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축제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다른 분들도 각자 맡은 일이 많아서 이를 해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황하고 지체할 시간이 없었죠.


우선 심호흡을 가다듬고 포털사이트를 켰습니다. 그다음 버스 업체를 검색했고,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모든 버스 업체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 일을 하기 전에만 해도 저는 전화를 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상대방이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떡할지, 잡다한 고민을 하는 소심한 성격이었죠.


그런데 모든 업체에 전화를 걸면서 '닥치면 다 하게 된다!'는 걸 몸소 깨달았습니다. 태울 수 있는 승객수에 따른 차량 비용은 어떤지, 동선에 따른 왕복 비용은 어떤지, 몇 대가 운행될 수 있는지 등 등... 이왕 하게 된 거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업체별로 꼼꼼히 비교 분석을 했습니다. 전화를 하기 전에는 조금 긴장됐지만, 점차 여러 곳에 전화를 하니 긴장도 줄어들고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버스 업체를 선정하고 축제 D-day 날!


8월의 뜨거운 햇볕을 등대 삼아 저는 디지털 미디어시티역에서 축제 운행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키도 작고 어린 제가 담당자가 되어 4~50대의 베테랑 기사님들 사이에 서 있으니 스스로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담당자가 된 이상 스스로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을 믿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버스 기사님들과 배차 간격과 운행 계획을 논의했습니다. 이후에는 용역 아르바이트를 오신 두 분에게 입장권 검사 및 현장 판매를 위한 관련 사항을 안내드렸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운행을 시작하자 꽤 많은 승객들이 찾아왔습니다. 버스 왕복 운행료가 포함된 입장권을 미리 구매하신 승객분들도 많았지만, 현장에서 구매를 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개의 카드 리더기 중 한 개가 작동하지 않아 입장권 판매가 지연됐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버스가 제시간에 배차되지 못할까 봐 애가 탔죠. 머릿속은 시간 계산을 하면서 동시에 입장료를 점검하고, 승객들이 안전하게 하차하는지 신경 쓰느라 모든 세포의 신경이 곤두선 기분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변수는 날씨였습니다. 월드컵경기장에서 승객들이 하차하려던 순간, 갑자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의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아침에 스치듯 본 소나기 예보가 떠올랐습니다. 월드컵경기장에서 내리고도 입구까지는 다리를 하나 건너야 했기 때문에 우산이 없으면 몸이 쫄딱 젖는 상황이었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승객들을 보며 저는 일단 비가 멎은 후 하차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예상된 배차 간격이 늦어지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은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패닉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비는 10분 뒤 멎어 들었고, 피크 타임이 지난 상태여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은 적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름 고비가 지나가고 축제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버스 운행을 종료했습니다. 오늘 하루 고생해주신 기사님들과도 꽤 친해져 농담 섞인 감사 인사를 드렸고, 아르바이트 분들에게도 축제용 물품을 챙겨드리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체력이 모두 소진된 상태로 현장에 갔을 때 축제는 거의 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길을 돌아다니며 땀범벅에 지친 얼굴이 역력한 동료들과 수고했다며 인사를 하던 도중 대표님을 마주쳤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수고했다는 말씀을 건네시며, 작년에는 버스에 대한 민원이 많았는데 올해는 버스에 대해서는 민원이 없었다며 어깨를 두드리셨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한 행사를 통제하는 다른 PM분들에 비하면 작고 작은 일이었지만, 내 몫의 일을 잘 해냈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고생이 다 보상받는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며 적합한 업체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일, 전날 새벽까지 축제 부스를 설치하고 꾸몄던 일,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먹으며 승객들을 안전하게 태워드리려 노력했던 오늘까지.... 이때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눈앞으로 웃으면서 축제장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붉게 노을 지는 한강이 아득하게 번졌습니다. 하늘을 붉게 물든인 노을을 보며 그토록 궁금했던 일의 원동력, '  일을 하는가?’ 대한 답을 내렸습니다.


모든 고생과 역경을 이겨낸 후 성공적으로 축제가 끝났을 때,
웃으며 돌아가는 사람들 뒤로 사그라들지 않는 열기 때문이 아닐까
 

축제가 이뤄지기 위한 모든 일과 변수를 받아내고 체화시킨 후,

'자신의 기획'에서 '모두의 축제'가 되도록 살신성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저는 문화기획사의 기획자들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이 일은 저에게 '맨땅에 부딪히는 힘'과 '역경에 버티는 힘'을 길러주었습니다. 


다른 회사로 이직 후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죠. 기획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면 무작정 부딪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그 사이에 역경이 찾아와도 버티고 또 찾습니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경험은 잊히지 않습니다. 


체력적, 정신적으로 정말 극한까지 치닫는 일이었지만, 무더운 여름 해가 지고도 축제의 열기가 가시지 않던 한강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지치고 힘들 때 그날의 노을을 생각하면 어쩐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게 처음이어도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였던 그날의 저와 성공적인 축제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모든 기획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정말 수고했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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