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은 참으로 이상한 도시다.
독일의 수도-
하지만 가장 독일스럽지 않은 도시.
독일어를 하지 못해도 생존할 수 있는 도시.
한량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붐비지 않는 도시.
처음 일 년은 이 도시가 너무너무 싫어서
런던으로 다시 이사 갈까 수천번 고민하게 만들었던 도시.
그러다가 어느덧 정들고, 익숙해지고,
마음에 들어버리기까지 해서
어느덧 런던보다 더 오래 살아버리게 된 도시이다.
1.
여느 수도들이 늘 그렇듯.
베를린에서는 독일스러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눈에 보이는 거리의 건물들, 독일 전통 맥주집-
유럽스러움이 곳곳에 묻어있지만,
관광객을 겨냥한 작위적인 유럽스러움도 곳곳에 묻어 난다.
옛 동독의 수도로 동독 중심에 있었지만,
분단 시절에도 동 베를린은 구 소련이,
서 베를린은 프랑스, 영국, 미국의 통제 하에 있었기에
베를린 내에서도 지역마다 건물 스타일도 분위기도 정말 다르다.
독일 전통의 문화를 느끼고 싶은 여행객들은 대부분 뮌헨으로-
옛 독일의 분단을 비롯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여행객들
(혹은 단체 수학여행으로 어쩔 수 없는 끌려온 다른 지역의 독일 학생들)
은 베를린으로 여행을 온다.
물론,
베를린에서 매주 열리는 다양한 문화 이벤트,
무엇보다 유럽에서 제일 핫한 클럽과 일렉트로닉 뮤직의 메카라는 점도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을 베를린에 머무르게 하는 이유이다.
2.
런던에서 석사 하겠다고 아이엘츠를 준비하며,
내 인생에 언어 공부는 영어가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했었다.
아직도 피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지독한 스트레스의 흔적들...
이 놈의 영어라는 놈은 머리 굵어서 배우려니
어찌나 늘지가 않던지...
다시금 유럽 살이를 결심했을 때,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영어로 생존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2년이 지난 지금 아주 간단한 독일어 정도는 알아듣지만,
2년 영국 살이 이후 내 영어 실력과
2년 독일 살이 이후 내 독일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관공서나 슈퍼마켓, 우체국 같은 곳은 아무래도 독일어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특히 베를린 관공서는 악명(!)이 높다. 불친절과 독일어 어택의 콤보랄까...
하지만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 특히 베를린의 중심지라 불리는 미테(Mitte) 지역은
카페에 가서 독일어로 주문하면 영어로 주문해 줄 수 있느냐고 되묻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베를린에서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지만,
회사 내 공식 언어는 영어이고,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영어가 대부분.
2년 넘게 베를린에 살며, 독일어가 전혀 늘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회사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독일어 수업을 제공해주어
그나마 가지고 있는 얄팍한 독일어 실력을 잃지 않고는 있지만,
영어로 살고, 일하고, 노는데 문제가 없으니
독일어를 배워야겠다는 독한 동기부여가 전혀 없는 셈이다.
3.
베를린에는 참 프리랜서(라 쓰고 한량이라 읽는다)가 많다.
핫한 테크 씬으로 물론 디자이너, 개발자, 창업자 등 잘 나가는 프리랜서들도 많지만,
'베를린이 핫하니까-'
라며 별 생각이나 계획 없이 베를린으로 온 이들도 적지 않다.
나 역시 그랬었고...
아마도 수도 치고는 아직까지 저렴한 베를린의 물가도 한몫하는 것 같다.
한 예로 런던은, 비싸기도 악명 높은 물가와 집세, 교통비 등-
계획 없이 무작정 살겠다고 덤비기에는 행복하기 참 어려운 도시이다.
아르바이트나 미니 잡을 해서 살아갈 순 있지만,
좁은 아파트를 여러 명이 나누어 살거나
밤길에 공포를 온몸으로 느낄 정도의 위험한 동네에 살 각오를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하지만 베를린은 다르다.
베를린에서 오래 살았던 몇몇 유럽 친구들은
지난 몇 년간 베를린 집세가 너무 올랐다며 불평불만이 많지만,
런던이나 다른 유럽의 수도에 비하면 아직 까진 아주 행복한 가격이다.
가난이 불행이나 억울함을 불러오지 않는 도시,
돈이 없어도 너무나 재미있게 사람들과 어울려서 놀 수 있는 아주 이상한 도시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바라본 베를린은 그렇다.
어둡고, 더럽고, 가난 하지만,
재미있고, 흥미롭고,
그러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아주 이상한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