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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Sep 24. 2017

포도가 주는 달콤한 고통

어릴 적 포도 씹는 것이 두려워 통째로 삼켰다

요즘은 포도가 제철이다

포도를 먹는다. 하루 1송이 이상 먹는다.


포도 한 알을 입에 넣는다. 포도 알맹이가 껍질과 분리되며 달콤한 액을 뿜어낸다. 탱글탱글한 속살을 가진 포도 알맹이를 머금은 내 입은 너무도 즐겁다. 젤리의 인공적인 맛과 비교할 바가 안 된다.


어릴 적 난 포도 맛의 즐거움을 이부분에서만 찾으려고 했다. 포도 알맹이를 씹었을 때 느껴지는 신맛이 두려웠다.


수차례 포도 알맹이를 씹어보곤 했다. 하지만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신맛은 내게 반갑지 않았다. 포도의 달콤함에 대한 환상을 깨버리는 나쁜 존재였다.


결국 난 내가 원하는 달콤함만을 간직하기 위해 포도 알맹이를 통째로 삼켜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 삶의 포도는 달콤한 존재였다.


물론 신맛을 포기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포도는 내게 달콤한 고통을 선사한다

지난 30여년을 삼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내 식도는 내가 삼키기를 원하는 포도 알맹이들을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로 "삼켜"라고 명령을 했음에도 식도는 부담스러운지 혀를 시켜 식도에서 먼 곳으로 밀어냈다.


생각해봤다. 식도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포도 알맹이가 작을 때에는 먹을 만한데 조금이라도 커지면 알맹이를 삼켰을 때 약간의 고통이 느껴진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한송이를 다 먹었다. 포도 알맹이를 삼키도록 식도를 위로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위에서 불평이 올라왔다. 먹을 때에는 좋았는데, 위 속에 알맹이들이 수북히 쌓여있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위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어제도 포도 한송이를 먹었고 그제도 한송이를 먹었다..... 내 위 속에 포도 알맹이가 수북히 쌓여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내가 죽어 묻히게 된다면 포도나무가 자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씹어야겠다

한송이를 더 꺼냈다.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단맛을 충분히 음미했다. 마지막 성찬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포도 알맹이를 씹었다. 신맛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탱글탱글한 포도 알맹이를 어금니 사이에 두고 힘껏 눌렀다.


어릴적 두려움과 대면하게 됐다. 너무 걱정을 했던 탓일까. 38살에 접한 포도의 신맛은 어릴 적 나를 공포로 밀어넣었던 신맛이 아니었다. 먹을 만했다.


연다라 포도를 씹어 먹었다. 간혹 씨를 씹어서 좀 난감했지만, 삼키기에는 훨씬 수월했다. 식도는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씹은 포도잔여물을 열심히 위로 실어날랐다.


포도 알맹이를 씹으니 통째로 삼킬때보다는 단맛이 덜한 것 같았다. 기분탓일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포도를 먹을 때 식도를 포도 알맹이가 훑고 가는 고통은 사라졌다. 하나를 포기하고 얻은 대가 치고는 컸다.


포도 알맹이를 씹었을 때 맞닥뜨렸던 신맛의 공포, 이제는 극복할 나이가 된 것 같다.


어릴 적 막연한 두려움으로 막연하게 지켜오던 나의 습관을 건강을 위해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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