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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Nov 25. 2015

#28. 게으름뱅이 낭만허세

필력은 타고났지만 성실하지 못했던 그

막내의 몸값

입사한 지 1년정도가 되니 어느정도 업무에 익숙해졌다. 기사는 아직 엉망이었지만 취재력은 괜찮은 편이었다.


동기가 없었기에 인기가 많았다. 선배들은 마구 부릴 수 있는 막내인 나를 원했다. 성격상 누군가와 부딪히는 것을 꺼려했기에 되도록이면 선배의 지시에 따랐다.


이런 면이 선배들로 하여금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선배 입장에선 까칠한 후배보다 말잘듣는 후배가 편할테니 말이다.

출입처 조정

출입처가 조정됐다. 나도 대상이었다. 부장은 내게 앞으로 산업 전문기자로 성장하려면 다양한 산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난 상관없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사귀는 것 자체가 내겐 큰 즐거움이었다.


IT를 담당하게 됐다. 내 1진은 낭만허세다.

언론사에서 1진은 고참기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언론사 규모가 클수록 여러명을 한 출입처에 둔다. 그럼 연차순으로 최고참이 1진, 그 다음이 2진 그리고 막내는 말진이라고 부른다. 말진들은 고참기자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불 동기들이 필요하다. 회사동기는 뿔뿔이 흩어져있어 대면하기 힘들다. 그래서 출입처에는 말진 기자 모임이 활성화되곤 한다.

출입처가 조정되면 전화돌리다 한 주가 다 지나간다. 출입처에 전화해서 출입기자가 바뀌었으니 이메일과 휴대전화 번호를 저장해달라고 해야한다. 그래야 보도자료를 받을 수 있다.


업계 장악력이 좋은 1진 선배를 만나면 출입처 등록이 수월하다. 해당 업체에서는 출입기자 변동 여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기사를 쓰는 기자를 관리한다는 건 이런 걸 말한다.


그 반대로 기사를 전혀 쓰지 않고 기자로서의 권위만 누리는 1진 밑으로 가면 엄청 스트레스 받는다. 기자등록을 하려고 할 때부터 은근 무시당하는 기분이다.


사실 이때 그랬다. 1진 선배가 출입처 관리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출입 기자가 있었는지 조차 모르는 곳도 있었다.


마음통 선배의 충고가 떠올랐다.


"기자는 개인사업자야. 매체 영향력이 아니라 기자의 맨파워가 중요해. 가자는 기사로 말한다는 걸 명심해"

아쉬움과 기대...

첫 회의다. 산업부란 건 같았지만 1진이 바뀌고 첫 회의. 마음통 선배와 팀워크를 맞추지 못한다는 게 많이 아쉬웠지만 한 편으로는 기대가 됐다. 낭만허세는 사내에서도 뛰어난 필력으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 팀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내게 자랑스러운 선배였다. 유력 경제지 출신에 사회부도 경험했다는 그의 이력은 내게 경이롭기까지 했다.


타사 기자들을 만나면 1진 선배가 유력 경제지 출신이 있다고 떠들어 댔다. 나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1진 선배를 팔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었지만... 그 땐 남을 팔아서라도 자존감을 높이고 싶었다. 나도 괜찮은 기자이니 매체만 보지 말고 내 인격을 좀 봐달라고 떼쓰는 모양새였다...

월요일 회의

매주 월요일이면 대면 회의를 했다.


회의에서는 한 주간 취재 아이템을 정하고 자신이 들은 고급정보를 교류했다. 메신저로 공유하기 민감한 사안들을 모아 따로 이날 공유했다.


장기 취재 아이템에 대한 아젠다 세팅도 함께 이뤄진다.

엥??? 왜이러실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낭만허세의 보고가 매번 어디선가 들었거나 봤던 내용이었다. 물론 기사를 보면 새로운 내용 같았다.


선배에게 죄송하지만, 1진의 기사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타사 기사 모니터도 더 촘촘하게 했다.


그러다 알게 됐다... 워낙 필력이 좋아 기사로 송고되면 취재한 내용 같았지만...


1진이 보고하는 내용은 그 전 주나 전 전 주에 이미 매경 한경 등 유력 경제지에서 보도됐던 내용들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신기하게도 회의에서는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선배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미우나 고우나 1진 선배이니...

너무 심한거 아냐?

그렇게 3개월 정도가 지났다. 낭만허세 선배는 변함없었다. 아이템 발제는 새로운 게 없었다. 출근은 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이템 발제하면 기사는 단번에 써내려갔다. 기사 쓰는 데 반나절도 안 걸렸다.


오히려 위에서 시키는 특집기사 처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정도였다. 물론 이 마저도 내게 전가되기 일쑤였다.


하루는 재계팀장이 내게 물었다.


"걔 요즘 뭐하냐? 연애하냐?"


"......"


"일을 안해도 정도껏 안해야지 너무 날로 먹는 것 아니냐?"


"......"

에필로그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죠. 특히 기자의 경우 검색만 하면 그 기자가 요즘 뭘했는지 바로바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부서인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도 모두 드러나죠.

후배들이 가끔 제게 묻습니다. 이직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이죠...

사실 이직은 운도 필요해서 이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은 제시하지 못합니다. 제가 스카우타도 아니니까요.

그 대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최근에 쓴 기사를 내게 좀 말해볼래? 자신있게 취재했던 기사를 말이야. 기사를 취재하면서 겪은 뒷얘기도 좀 해줘."

이 질문에 자신있게 답하는 후배는 소수더군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자는 필력도 중요하고 취재력도 필수입니다. 그럼 이 두가지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대해 묻는다면 전 취재력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주목받을 수 있는 기사를 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업계의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눈에 띄는 기사를 써야 고급 취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취재원들은 보통 기자를 만나기 전에 해당 기자가 쓴 기사를 검색해보고 오더라고요.

그들은 신생매체더라도 열정이 묻어나는 기자에게는 기사꺼리 한 개라도 흘려줍니다. 제가 온라인매체에 있을 때 만났던 취재원들은 그랬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 기자는 마음통 선배처럼 매체력을 초월한 기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필력은 어차피 단기간에 나아지는 것이 아니기에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면 됩니다. 매체력이 높아질수록 요구하는 기사의 완결성 수준이 높아집니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다보면 필력은 자연히 좋아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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