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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Nov 11. 2015

#26. 지름길 vs 우회길

가능하면 바로 가라...돌아가는 길은 험난하니

스승님

입사하고 1년쯤 됐을 때다. 수험생 시절 멘토였던 선생님을 만났다. 우연히 행정학 수업을 듣던 중 만난 귀인. 당시 그는 30대 중반이었지만 그릇의 크기가 남달랐다. 수험생 시절 다짜고짜 상담해 달라며 찾아간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줬던 그. 인생의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 그는 학교 본관 식당 앞 벤치에서 내 인생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곤 했다. 인생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내겐 늘 감사하고 감사한 분이다.

졸업 후

통 찾아뵙지 못했다. 전화로는 종종 안부 인사를 드렸지만...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다.


힘들 때 나를 응원해주고 아낌없는 조언을 해줬는데... 돈을 벌고 있으면서 따뜻한 식사 한 끼 대접 못 했다니... 나란 인간도 참......

건배

이날 자리는 그래서 만들어졌다. 은사님을 대접하는 자리. 학교 근처 삼겹살 가게에서 만났다. 선생님의 추천 가게.


삼겹살 2인분과 소주 그리고 맥주를 시켰다. 입사 후 소맥이란 걸 처음 알게 됐다. 폭탄주의 세계로 입문했다.


1년여 동안 열심히 제조했다. 부지런히 마셨다. 그 결과 소맥 황금비율을 체득했다고 생각했다. 나름 공식도 만들었다. 선생님 앞에서 자랑해 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객기였다. 술 제조가 무슨 자랑이라고......


야심차게 한 잔을 말았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신 뒤 병권을 가져가셨다.

한 홉
출처 : 다음 국어사전

"소주와 맥주의 비율 배합도 중요하지만 한 잔의 양도 상당히 중요해."


"아~~!!! 내공이 느껴져요!"


"앞으로 기억하렴. 소맥을 제조할 때엔 상대가 한입에 털어 넣기 부담스럽지 않은 양으로 하는 게 좋아. 그걸 한 홉이라고 하지. 자~ 마셔봐~! 단번에 마시기 부담스럽지도 않고 깔끔하지?"


"선생님! 대단하세요~~"


"술을 권할 때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어야 해. 앞으로 기자 생활하면서 술 마실 일이 많을 텐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배려하는 그런 기자가 되길 바라."


"고맙습니다".


......


술 잔이 수차례 돌았다. 병들이 옆에 쌓여갔다. 선생님과 난 그동안 못 나눴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비웠다.


선생님은 얼굴이 뻘겋다 못해 터질 듯했다. 나 역시 얼큰하게 취했다.

형님과 아우

어느새 우린 형님과 동생으로 호칭을 정리했다. 내가 99학번이고 선생님이 94학번이니 나이 차이도 5살밖에 안 돼 거부감은 없었다.


두어 시간이 흘렀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주변은 시끌벅적했지만, 우리 테이블은 적막이 흘렀다.


잠시 뒤... 침묵을 깨고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진지한 표정이었다. 눈빛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난 자세를 바로잡고 경청할 준비를 했다. 정신을 바짝 부여잡고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했다.

두 길

선생님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러웠지만 강단 있는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말 속에는 그만의 배려가 묻어있었다.

목표로 하고자 하는 곳에 단번에 가는 것과 돌아가는 것. 즉, 지름길과 돌아가는 길.
그런데 돌아가는 길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어떤 시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돌아서 간다고 했을 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어. 그 누구도...
다만, 이겨낼 자신이 있다면 시도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아. 너 자신을 믿는다면 말이지...
난 네가 지금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힘내렴.

요약하자면 이 얘기였다. 술에 취해 들었던 탓에 정확한 워딩을 기억할 순 없었지만, 핵심 내용은 기억한다. 그날 내 가슴속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당시 내게 큰 깨달음을 준 말이다. 그전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제 막 들어선 길...

선생님과의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참을 생각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나의 현재와 '미래의 내 모습'에 대해...


난 이제 발걸음을 떼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들어선 길은 돌아가는 길이었다. 갈림길에서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난 알 수 없었다. 이 길이 얼마나 먼 길인지... 어떤 시련이 내 앞에 다가올지...


이 길을 가는 동안에도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할 것이다. 때론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솔직히 두려웠다.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한 번 가보자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당시 난 잃을 게 없었다. 그 누구도 내게 기대하는 이가 없었다. 난 그저 적은 월급일지라도 정규직으로 일만 할 수 있으면 됐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걷다 보면 나처럼 돌아가는 이도 만나지 않을까.
오래 걷다 보면 인생의 동반자도 만나지 않을까.
걷다 보면... 걷다 보면... 걷다 보면...
될까... 될 거야... 되고말고... 되겠지...

라고 되뇌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길 한복판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떼며 걸었다.

조심조심 아주 조심조심...

에필로그
지금 생각해보면 제 예상보다 돌아가는 길은 멀지 않았습니다. 만 3년여 만에 CBS란 곳에 입사했으니 말이죠.

그런데 제 경우엔 거의 운이 99.9%였습니다. 제가 어떤 부분이 경쟁력이 막강해서 입사했다고 하기엔 부족한 게 많았습니다. 이전 편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전 과대하게 포장된 면이 많거든요.

누군가 제게 "이직은 이렇게 하는 거다 등에 관해 이야기 해달라"고 한다면... 난감합니다. 굳이 하라고 한다면, 어릴 적 봤단 CF 카피처럼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라는 상투적인 표현밖에 못 하겠네요...

오늘따라 사족이 길었습니다. ^^

혹시 이 글을 읽은 수험생분들 중에 제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돌아가는 길을 택할래요"라고 말이죠.

그럼 전 우선 말리고 싶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해 선택한 거라면 말이죠.

거듭 말씀드리지만, 돌아가는 길은 참 많이 고되고 힘듭니다. 저야 지나간 일이니 이렇게 쉽게 말하지만, 당시를 생각해보면 끔찍합니다. 지금의 제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저 하루하루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나 그런 고민의 연속이었다고 할까요.

저는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돌아가는 길에서 좌절하면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저널리스트가 아닌 광고를 따오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고요. 어떤 이는 여기에 순응해 살아가며 더는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이들은 기자가 아닌 괴물로 변하기도 합니다.

아 참!!!

최근에 선생님을 만나 뵀을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긴 해요...

"미안하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하긴 했는데 사실... 그 말 하고 엄청나게 후회했다. 돌아가는 길에서 목표를 성취한 이들이 극소수이기에 사실 난 네가 여기까지 오리라고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잘 성장했으니 뿌듯하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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