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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eah Nov 23. 2021

물속에 빠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위를 걷자

- 정호승의 <산산조각>, <물위를 걸으며>를 읽고

한국은 실패에 대한 관용이 거의 없는 나라다. 유년시절의 학업 성취도를 대입수능시험 한번의 기회로 평가해버리곤, 그 점수를 줄세워 대학을 결정짓고, 그 간판이 일생을 따라다니며 한 사람을 규정한다. (요즘에는 많이 바뀐것 같지만 아직도 학벌에 대한 선입견과 집착은 대단하다). 흔히들 말하는 '결혼 적령기'에 인연을 만나지 못하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만나던 사람과 헤어지고 그 시기를 넘겨버리면 영영 누군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금새 그들은 노처녀 노총각이 되어 '우리 누구 빨리 결혼해야하는데, 어디 좋은 사람 없나'라는 덕담으로 위장한 오지랖을 강제로 들으며, 매 술자리마다 씹기 좋은 술안주가 되어버린다.


한번의 실패, 한번의 선택으로 인생이 바뀌어 버리는 것들을 듣고, 보고, 경험하면서 나이가 들수록 삶의 다양한 도전에 대한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아졌다. 특히, 점점 성취해야할것 보다 잃을게 많아지는 나이가 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용기내어 무언가 도전하려 하지 않고 있는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다. 새로운 진로나 직장에 도전하는것, 소신있게 할말 다 하는 것, 우연히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 역시 먹고사는 현실이나 사회가 정해놓은 나이의 규칙들을 생각하다 보면 선뜻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


용기라는 단어는 그래서 거칠다. 어느 정도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믿음을 내포하고 있는 동시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지 않고 뛰어드는 자세이자 행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삶의 다양한 과정에서 용기를 내기가 힘들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역시 실패하면 어쩌지, 불쑥 내민 내 손이 부끄러워지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한번 잘못된 선택을 해서 원하던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튕겨나가 버리면 내 인생이 영원히 '실패자'로 규정되어 버릴까봐 너무 불안했다. 그런 나에게 무언가 깨닫게 해준 시가 있다.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라는 시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산산조각날까 무서워 품안에 있는것을 꽉 움켜쥐고는 한껏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 산산조각나도 괜찮아 하고 부드럽게 머리를 메만져준다. 실패해도 괜찮아, 그대로 잘 살아갈수 있어 라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 내 마음을 짙게 위로한다.


정호승 시인의 용기에 관련된 시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물 위를 걸으며>이다. 특히 이 시는 사랑앞에서 차마 용기내지 못해 유기견 마냥 잔뜩 겁을 먹고 있을때 마다 떠오르는 시이다.


물 속에 빠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발이 빠지지 않는다

물 속에 빠져
한 마리 물고기의 시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무릎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물 위를 걸어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물 속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출렁출렁 부지런히 물 위를 걸어가라
눈을 항상 먼 수평선에 두고
두려워하지 말고
전시회 <비욘더로드>에서 찍은 사진


어느덧 서른 셋,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가 두려워진다. 마지막일것 같았던 사랑을 서른 둘에 떠나보내고 영 마음을 정착하지 못했다. 마땅한 사람을 못만났다거나 노력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사람과 또 헤어지면 어떡하지, 중요한 시기의 내 일년을 또 낭비하면 어떡하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생각들이 마음의 벽에 겹겹히 쌓여서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야했다. 물 속에 빠져 죽으면 어쩌지라고 걱정하는것 보다, '잠겨죽어도 좋으니 너는 내게 물처럼 밀려오라'라는 자세를 가지고 사랑을 대해야했다. 이 나이에 결혼을 해야한다는 세상이 정해놓은 규정을 지키기위해 애쓰기보다 사랑에 빠지고 사람을 읽는 세상에 대한 진심어린 심장이 필요했다.


인생은 참 짧다. 시에서 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더 짧은 시간인것 같다. 그간 상처받을까봐 두려워 문을 꽁꽁 걸어잠그고 오직 내 세상으로만 숨어들어가던 나를 반성하고, 물속에 빠져죽는다는 자세와 용기로 사랑에 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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