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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Jul 04. 2019

'살랑', 멀리 떨어진 식탁

NO.2 - 전,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에디터 & 포토그래퍼 - 안휘수

  


빗소리와 함께 술을 마신다면 어떤 술이 맛이 없을까. 

그중에서도 막걸리와 전은 비 오는 날과 찰떡궁합이다. 일이 있어 서울로 올라가야 했던 날 반가운 비가 내렸다. 더위에 찌들어 버린 밭과 필자에게는 꼭 필요했던 비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와 함께 찾아온 막걸리와 전에 대한 그리움은 필요 이상으로 반가웠다.



서울에서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와 제일 먼저 일기예보를 찾아보았다. 언제쯤 비가 오는지 알아내서 그 날에 맞춰 막걸리를 빚을 예정이었다. 매실청을 섞어서 만들어 볼까, 옥수수 전분을 사서 넣어 볼까, 까짓 거 두 가지를 모두 만들까. 하지만 야속하게도 일기예보에는 빨래가 잘 마를 것이라는 소식 말고는 더 반가운 소식이 없었다.



평소 술을 즐겨 마시지 않아서인지 다행히도 막걸리를 향한 생각은 금방 떠나갔다. 하지만 마당에서는 부추가 자라고 있었다. 감자잎이 마르고 캐낸 감자와,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몇 배는 커다란 애호박까지 주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막걸리를 향한 생각은 비와 함께 금방 떠나갔지만, 전을 향한 생각은 주방을 가득 채워버렸다.



전 부치는 방법은 쉽다. 적당히 달궈진 팬에 기름을 둘러 반죽을 올리고 익으면 뒤집는다. 

하지만 거기까지의 과정은 절대 순탄치 않다. 쫀득한 맛을 내기 위해 감자 전분을 만들어야 하는데, 믹서기가 없으니 모든 게 수작업이다. 일일이 잘게 썰고, 물에 담가 빻아주고, 채에 걸러주다 보면 반죽은 알맞은 점성을 찾고 부침가루가 뭉치지 않게 하도록 손톱 사 반죽이 끼는 것을 감수하면서 맨손으로 저어준다.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뜨겁게 달궈진 팬 앞에 서면, 온몸에서 기다리던 비 대신 땀이 무수히 흐른다. 누구한테 주는 식탁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지만, 대답은 ‘무조건 전이 먹고 싶어’였다. 단순히 하고 싶었다.



요즘 유행하는 이슈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더 이상은 사회를 위해서, 주변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오로지 나만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는 그리 쉽지 않다. 벚꽃을 보러 가고 싶어도, 시험이 코앞이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훌쩍 떠나고 싶어도, 대출이 발목을 잡는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중에 선택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 전제에 숨어있는 함정은 하기 싫은 것은 대부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걱정도 늘어나는 현시대에서, 여전히 짧은 인생이라며 그 순간을 찬란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말은 약간 강압적이게 들리기도 한다. 하고 싶은 것 대신해야 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오히려 주변에서는 겁쟁이라는 시선으로 억울하게 쳐다보는 경우까지 생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이 행복을 위한 길인지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해답이 없다, 적어도 아직은. 그러므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살게 된다. 그렇게 고민하는 지금, 가끔은 ‘굳이’ 어떠한 일을 하게 된다. 이 일은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가끔은 귀찮고 번거로우며 멍청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코 그 선택이 삶을 퇴보시키지는 않는다. 무조건 행복해지는 일은 아니어도, 그 선택이 깊은 후회를 만들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비도 오지 않는 뜨거운 여름날, 편리한 도구도 없이 땀을 흘리며 전을 부치는 행동이 그렇다. 단순히 전이 먹고 싶다는 이유로.



부추전 반죽을 넓고 얇게 펼친다. 뒤집다가 찢어진 부분은 달걀을 이용해서 이어준다. 보는 이는 없지만 실수는 최대한 조용히 처리한다. 감자전 반죽은 살짝 두껍게, 덩어리를 나누어서 부친다. 겉은 완전히 바삭하게 튀겨주듯 구워주면 그 속은 더욱 쫄깃해진다. 

이미 충분히 땀으로 홍수가 났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애호박까지 마무리해준다. 얇게 썬 애호박에 부침가루를 무쳐주고 달걀옷을 입혀 팬 위에 올린다.

식탁에 다른 반찬은 올리지 않는다. ‘굳이’ 전이 먹고 싶어 전을 부쳤으니 오늘은 전만 먹을 것이다. 특별한 날이고 주인공은 정해져 있다. 오늘 전을 먹었다는 기억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비가 온다면 잠깐 스쳐 갈 정도의 기억이다. 적어도 그날 오늘을 되돌아본다면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닐 것이다. ‘굳이’ 만든 전이 너무 맛있다.



※ 위의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매거진 랑', 그리고 산하 에디터에게 전적으로 있음을 안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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