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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May 09. 2021

의사의 말 한 마디에 따라 시한폭탄이 될 수도

시한폭탄

신경외과 실습을 돌던 중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한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얼마 전 혈변을 보았노라고 연락이 왔길래 ‘형은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하니 크게 걱정하지 말고 우선 병원에 가보라’ 말했던 터라 썩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아든 나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암으로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병명은 말트림프종(MALToma)이었다. 다행히 말트림프종은 혈액암 중에서도 항암치료에 효과가 좋은 편에 속하여 다른 혈액암보다는 예후가 좋았지만, 그래도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진단되었다는 사실이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바로 작년에 형님의 아버지께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던지라 나는 형님의 암 발생이 어떠한 유전적 소인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형님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다시 진료를 받아보고 싶다고 말하며 나에게 교수님을 추천해주길 원하였고, 나는 림프종을 진료하는 한 유명한 교수님께 찾아가보라고 권하였다. 


형님과 전화를 끊은 나는 불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다음 실습 일정을 위해 혈관조영실로 향하였다. 혈관조영실에서는 뇌동맥류 코일색전술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뇌동맥류는 뇌혈관의 한 부분이 꽈리를 튼 질환인데, 이 꽈리가 터지게 되면 거미막하출혈이 발생한다. 거미막하출혈이 발생하면 삼 분의 일은 병원에 오기 전에 사망하기 때문에 터질 위험이 있는 뇌동맥류는 미리 예방적으로 치료를 하게 된다. 그 치료 중 하나가 코일색전술인데 이는 혈관 속으로 금속 코일을 넣고 꽈리를 코일로 메꾸어 동맥류가 터지지 않도록 하는 치료를 말한다. 교수님께서는 100명 중 한 명에서 뇌동맥류가 발생하고, 뇌동맥류 환자의 100명 중 한 명에서 동맥류가 터지기 때문에 터질 위험이 있는 뇌동맥류들은 예방적으로 시술하고 터질 위험이 낮은 뇌동맥류들은 주기적으로 관찰하며 지켜본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터지는 즉시 삼 분의 일이 사망하는 뇌동맥류를 머리에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의학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하는 학문이고 위험이 낮은 뇌동맥류를 무작정 치료하는 것은 통계적으로 이점이 없으므로 이내 교수님의 말씀에 수긍하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다시 고향의 형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권해준 교수님을 뵙고 왔는데 교수님께서는 몸의 다른 부위에 전이가 있는지 확인해 본 후, 전이가 없고 병변이 직장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굳이 치료를 시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직장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굳이 그 작은 병변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공격적으로 항암치료를 진행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고, 수술로 직장을 절제를 하자니 병의 심각성에 비해 너무 과한 처치가 아닐까 하는 게 이유였다. 나는 ‘그 정도의 병변이면 치료를 하는 게 별다른 이점이 없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증명이 되었나보다’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형님의 반응은 달랐다. 형님은 나에게 다른 병원의 교수님을 한 번 더 만나볼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몸에 암이 있고 이것이 언제 커지거나 전이될지 모르는데 평생을 그렇게 시한폭탄을 안고 살기는 싫다는 것이었다. 


의료계에서는 근거를 매우 중요시여긴다. 근거 중심 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은 의학이 과거의 경험주의적인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방법론을 가진 과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근거가 병에 대한 환자의 반응을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근거는 질병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지만 근거만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는 없다. 언젠가는 터질지도 모르는 뇌동맥류, 혹은 언젠가는 퍼져버릴지도 모르는 암 덩어리들을 안고 살아가는 환자들에게 단순히 “아직까지는 통계적으로 의미없어요”라고만 말한다면 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을 해가며 진료 계획을 세우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다행히 형님은 교수님의 말대로 하기로 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교수님께서는 꽤나 친절하고 상세히 설명을 하며 형님에게 믿음을 준 것 같았다. 같은 질병이더라도 의사의 말 한 마디에 따라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고 그저 조금 성가신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인식론적으로는 다른 질병을 진단받고 다른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언젠가 만나게 될 나의 환자들은 적어도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진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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