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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Jun 01. 2021

어떠한 것들을 놓치며 살지 뻔히 보이는 길 위에서

일평생

의사라고 하면 주변에서 흔히들 기대하는 바가 있다. 높은 소득, 비교적 자유로운 근무 시간, 그리고 안정적인 일자리. 하지만 모든 의사들이 그렇게 풍족한 삶을 사는 건 아니다. 특히 의과대학 교수가 그렇다. 밖에서 보았을 때 대학병원 교수라고 하면 그야말로 명예의 절정이오, 누구나 선망하는 직업인 것 같으나 가까이서 살펴보면 그만큼 고난스러운 직종도 드물다. 대학병원으로 몰려오는 어려운 환자들을 치료해야 하고, 혹 실수를 하거나 특정 증상을 놓치게 되면 의료소송에 휩싸이게 된다. 연구실적을 압박하는 병원에 떠밀려 늦은 저녁 외래 진료가 끝난 뒤에는 연구도 해야 한다.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시간과 무관하게 전화가 걸려오기 일쑤고, 그 바쁜 와중에 학생들과 수련의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 그야말로 본인의 삶은 놓치며 살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생각처럼 돈을 그렇게 많이 버는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대학병원 교수의 급여와 잘 나가는 개원가 의사들의 급여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 병원에서 생활하며 마주한 실상이 이렇다 보니 나의 눈에 대학병원 교수란 어느 정도의 명예를 얻는 대신 본인의 삶을 상당 부분 포기하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간호사인 친구가 일하는 중환자실에 익숙한 이름의 환자가 찾아왔다. 같은 병원에서 소화기계 암환자들을 진료하시던 내과교수님이셨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일평생 바쁘게 암환자들을 진료하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암환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얼른 입원하여 항암치료를 시행하였지만 암세포들은 끊임없이 자라 교수님의 몸을 갉아먹었고, 결국 교수님은 전신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날은 친구가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 주사를 맞았던 날이었다. 몸도 으슬으슬하고 전신에 근육통도 있고 영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하루만 일을 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간호사 선생님들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없다. 타이트하게 짜여진 3교대 일정에 펑크를 내면 다른 누군가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참고 출근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겨우 출근한 친구가 아픈 몸을 이끌고 교수님의 자리로 가 이런저런 처치를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개미 같은 목소리로 친구에게 말했다.

   "왜 어디 아파?"

조금 전까지 의식이 흐려져 비몽사몽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다시 의식을 차렸는지, 교수님은 핏기가 가신 친구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아, 제가 오늘 코로나 백신을 맞아서요. 이게 생각보다 너무 힘드네요."

친구가 괜찮다고 말하고 다시 일을 하려고 하는데 교수님이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아... 오늘 무슨 요일?"

   "네? 요일이요? 아, 오늘은 수요일이죠?"

   "그러면... 나 오늘 오프네. 외래 진료가 없으니 나가봐도 되지?"

친구는 당황했다. 교수님의 의식이 온전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친구의 마음을 흔든 건 교수님의 말이었다. 아무래도 교수님은 아직까지 본인이 진료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평생 암환자를 진료하며 전쟁 같은 일상을 버텨오다가 덜컥 암에 걸려 기어코 이 중환자실에까지 왔는데, 그의 마음은 아직도 진료실에서 맴돌고 있었다. 평생을 의학에 매진하며 본인의 삶을 지워 만든 여백에 암환자들의 시간을 채워넣고 살았으니. 그의 마음은 달리 떠날 곳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의과대학 생활을 하며 교수님들께 가졌던 불평과 불만이 정말 많았다. '저 분은 왜 저렇게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는 걸까?', '저 분은 학생 때 모든 걸 다 알았을까? 왜 그렇게 잘 모르는 학생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걸까?', '저 분은 환자들에게 왜 저렇게 말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늘 혼자 몇 마디 불평을 내뱉은 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어떠한 것들을 놓치 살지 뻔히 보이는 길 위에서, 교수님들도 저마다 나름의 사정과 고충들이 있을 테니까.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 이전에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써, 병원에서 일하며 환자들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교수님들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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