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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Jun 04. 2021

의과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너무 당연했던 말인데

초심


초심을 지키기란 쉽지가 않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다. 아무리 구체적이고 훌륭한 뜻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막상 일을 하다보면 초심자의 시선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이기 마련이다.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시작 당시에는 너무 순진하게만 생각하였을 수도 있고, 지나다보니 경험이 쌓여 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이게 맞아'하며 넘어갈 일도 아니다. 처음과 달리 변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내가 어떠한 일을 시작할 때 추구했던 가치에 대해서는 무게중심을 잘 잡고 있는 것인지,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본질적인 목표를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오랜 기간 봉사활동을 하였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시각장애인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활동이었다. 주로 시각장애인분들을 모시고 산책을 하는 게 주된 활동이었는데, 시각장애인분들을 모시고 걷다 보면 나의 좁은 시야로는 보지 못하였던 것들을 볼 수가 있었다. 내가 걷는 길에 장애물은 없는지, 주변에 산책로는 충분한지, 문턱이 너무 높아 몸이 약한 사람들에게 위험하진 않은지. 심지어는 내가 보고 있었음에도 잘 보지 못하였던 것들도 있다. 시각장애인분들과 걷다 보면 지금 이 풍경을 설명해 주어야 할 때가 있다. 참새는 어떻게 날고 있는지, 햇볕이 내려쬐는 꽃은 어떠한 모습인지, 구름은 어떠한 형태와 질감으로 하늘에서 표류하고 있는지. 이렇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끼며 봉사활동을 마친 날에는 주어진 것들에 대해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한 것은 호스피스 봉사활동이었다. 생명과학을 전공하던 대학교 초창기 즈음, 한창 사회생물학이라고 하는 학문에 빠져있던 나는 문득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분자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삶과 죽음은 서로 맞닿아 있다'는 어느 동양철학자의 말을 생각해 보아도, 아니면 그저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아도, 죽음 또한 삶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늘 죽음을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시작하고자 여러 병원들을 알아보았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이유는 비슷하였다. 호스피스 봉사활동은 죽음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가진 않을지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관심을 보여준 곳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서울대학교병원이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의 호스피스 담당 간호사 선생님께서는 나를 앉혀두고는, 왜 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봉사활동은 얼마나 정기적으로 할 수 있는지, 환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마음이 울적해 질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위험이 있지는 않은지 차분히 여쭤보셨고, 제법 진중하게 대답을 하는 나의 모습을 알아주셨던건지 결국 나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호스피스 봉사활동은 내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환자분들과 말하는 게 너무 좋았다. 환자분들이 삶을 되돌아보며 해 주시는 말씀은 나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 것 없이 그냥 좋기도 했다. 어떤 환자분은 온 몸에 암이 전이된 말기 판정을 받으신 분이었는데, 정치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셨다. 나는 머리를 감겨드리며 나의 얕은 지식을 총 동원하여 환자분과 정치 토론을 하였고, 이에 흥미를 느낀 환자분은 머리를 감은 뒤에도 나를 앉혀두고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점심시간을 빼먹으면서까지 환자분과 대화를 나누었고 퇴근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환자분께서는 나더러 다음주에도 꼭 와서 같이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다. 허나 아쉽게도 다음주는 공휴일이라 봉사활동을 하지 못했고, 그 다음주에 병원에 방문해 보니 환자분은 이주 사이에 몸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는 게 즐거웠다. 답답한 와중에 재미난 거리를 발견했다는 환자분들의 표정도 나에게는 뭔지 모를 뿌듯함을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환자들의 모습에서 증상과 징후를 찾으려고만 노력하였고, 너무 바쁜데 필요한 정보는 쉽게 이야기해 주지 않고 관련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환자분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기도 하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조금만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 말을 대충 끊고 다시 필요한 이야기만 건네기도 하였다. 봉사활동을 하며 환자를 만나던 나와 의과대학에서 가운을 입고 환자를 만나는 나는 영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의학은 질병이 아니라 질병을 가진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어디선가는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이다. 병이 아니라 사람. 사람을 치료하는 것. 의과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너무도 당연했던 말인데, 이곳에 온 후로부터는 왜 이리도 어려운 말이 되어버린 것인지, 나는 당황스러울 뿐이다.




* 해당 내용과 관련하여 별도의 글을 쓸 예정이지만, 문맥상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략한 설명글을 덧붙입니다.


세포 안에는 염색체가 있다. 염색체는 우리 몸에 대한 정보, 흔히 말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 정보로부터 우리 몸이 사용할 모든 물질들이 만들어진다. 이 정보에 손상이 가면 세포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되고, 그에 따라 우리 몸이 늙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정보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철통보안을 만들어서 금고에 잘 넣어두면 좋을 것 같지만 그러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우선 몸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염색체에 내재된 정보를 자주 사용하여야 하는데, 염색체를 너무 강하게 묶어두면 우리 몸이 그 정보를 이용할 수가 없다. 이용하는 데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서 우리 몸이 효율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 염색체의 끝부분은 조금씩 닳기 마련이라, 이 끝부분을 새로 만들어주는 기전이 필요한데 이를 텔로머레이스(telomerase)라고 하는 효소가 담당한다. 하지만 이 텔로머레이스가 과도하게 작동하면 노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분열하는 세포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암세포 중에는 텔로머레이스가 과도하게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 즉 살기 위해 필요한 효소가 죽을 때에도 필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염색체는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남성의 경우,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감수분열을 통해 염색체를 정자에 담게 되는데, 염색체가 너무 강하게 묶여있으면 이러한 과정을 잘 시행할 수가 없다.


더 본질적인 문제도 있다. 염색체가 약하게 묶여있다는 말은 돌연변이가 잘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염색체가 튼튼하게 묶여있어 돌연변이가 발생하지 않으면 무조건 좋은 일일까?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들의 유전자가 동일하면 우리는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해 멸종하고 말 것이다. 즉 조금씩 발생하는 돌연변이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공격하는 바이러스가 발생하여도 운이 나쁜 몇몇 사람들만 운명을 달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 이상,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필요가 있다. 생각이 다르든, 취향이 다르든, 아니면 육체가 다르든 간에. 생명체란 애초에 다양성을 통해 살아남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운이 좋은 나의 뛰어남은 운이 나쁜 너의 불편함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 모두를 존중하여야 한다. 조금 더 복잡하게 말하면 '우리는 전체 유전자 풀의 보전을 잠정적인 기본 가치로 생각해도 무방하다.'1 조금 더 쉽게 말하면, 결국엔 다양성 그 자체가 힘이다.


 모든 내용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우리의 유전자는 본질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인문학적인 말로는 ‘삶이 있으려면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1. 에드워드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2000), p.270-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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