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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Jun 26. 2021

관심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관심

   “고놈 참 말 안 듣는다.”
어렸을 적 집안 어르신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그 시절 나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오죽했으면 큰아버지께서 나를 보고 '저 놈 인간될까' 생각했었다고 하셨을까. 일례로 어릴 적 우리집의 뻐꾸기 시계에는 뻐꾸기가 없었다. 시계에서 웬 새가 나오는 걸 신기해했던 내가 시계 앞에서 가만히 기다렸다가 12시가 되는 순간 '뻐꾹'하자마자 뻐꾸기를 잡아 뜯었기 때문이다. 친누나의 말로는 플라스틱 골프채를 들고 누나들을 때리겠다며 쫓아오는 내가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하니, 내가 얼마나 골칫거리였는지 눈에 선하다. 그래도 그런 호기심 천국에 살던 나를 크게 나무라지 않아 내가 삐뚤어지지 않고 잘 클 수 있도록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환자를 볼 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많다.
   '정말 말 안 듣는다.'
약은 왜 그렇게 안 챙겨 먹는 것인지. 진료는 왜 그렇게 빠트리는 것인지. 왜 기본적인 노력조차 안 하는 것인지. 제법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도 예외는 아니다.
   “살을 빼셔야 해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방간이 너무 심해요. 이러다가 간이식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지방간이 심하게 있는 환자였는데 진료를 다닌 2년 동안 0.5kg 정도만 감량한 상태였다. 교수님께서 버럭 화를 내며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냐고, 제가 몇 번을 말하냐고 다그쳐도 환자는 그저 멋쩍게 웃으며 "그러게요" 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하루에 약 두 알 챙겨먹는 것조차 협조가 안 되는 분들도 있다. 그런 환자들을 볼 때면 본인의 건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일인데 왜 이렇게 미련한 건지 의아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언젠가 몸이 안 좋아 항생제를 5일 정도 먹어야 하는 날이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식사 30분 후에 드시면 됩니다. 약 드시기 두 시간 전후로는 커피나 차 같은 카페인 음료는 피해주시고요. 우유도 약물의 흡수를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 피해주세요. 그리고 당연히 약 드시는 일주일 동안은 술 드시면 안 됩니다.”
   “아, 네. 잘 알겠습니다.”
나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마침 학교에서는 임상약리학이라는 수업에서 약물 간 상호작용에 대해 배우고 있던 참이었다. 약물 간 상호작용은 생각보다 드라마틱하다. 특정 약물은 다른 약물의 흡수, 분포, 대사, 배설 등에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자몽주스가 약물의 흡수나 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약물 간 상호작용이 발생하면 체내 약물 농도가 높아져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약물 농도가 낮아져 기껏 힘들게 먹었던 약물들이 말짱 도로묵이 되버릴 수도 있다. 한창 이런 내용들을 공부하고 있던 나는 약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사항들을 휴대폰에 잘 기록해두고 약을 받아왔다.


허나 자신감과 달리 내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일단 하루에 두 번씩 다섯 날, 총 열 번의 약 섭취 중에서 이틀을 빼먹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바쁘게 살다 보니 ‘아, 맞다. 약!’ 하고 깜빡했을 뿐이었다. 또 하루는 도무지 참지 못하고 커피를 마셔버렸다. 정말 너무 졸리고 피곤하여 커피를 마시지 않고는 오전 하루를 다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또 다른 하루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약을 먹기도 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입맛이 없어서 밥은 먹기 싫은데 약은 먹어야겠고. 그리하여 그냥 빈 속에 약을 먹었다가 속이 너무 울렁거려 토를 하기 직전까지 갔었던 적도 있었다.

외래에서 보았던 환자들도 내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는 약을 잘 챙겨먹지 못하는 숨겨진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삶이 너무 바쁘거나, 근무 환경이 열악하여 도무지 약을 먹을 시간이 없다거나, 이미 먹고 있는 약의 갯수가 너무 많다거나, 집이 너무 어지러워 약 봉투를 찾기가 어렵다거나. 그들을 두고 그저 ‘말 안 듣는 환자’ 내지는 ‘미련한 환자’ 정도로만 평가한다면 환자를 이해하는 일은 아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사가 매번 환자에게 전화해서 빨리 약 먹으라 독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환자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는 방법밖에 없다. ‘왜 그렇게 약을 못 드셨어요?’, ‘약의 갯수가 너무 많아요?’, ‘주로 어떤 상황에서 약을 먹어요?’, ‘다음엔 이런 방법으로 노력해봅시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눌수록,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수록,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일수록 약물 복용에 대한 환자의 인식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여야 한다. 설령 환자는 본인의 건강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환자의 건강에 관심이 있으니까. 관심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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