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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May 09. 2021

남에게 선고를 내리며 마지막을 전하는 일상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좋다. 구성을 갖춰 일목요연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들과는 대화를 나누기가 편하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주고 받는 말들이 아 다르고 어 다르고 하다 보면 한참을 대화하여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어렴풋한 실타래를 잡아가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말과 말 사이에 아득한 거리감만 느껴지고, 흘러간 시간들 속에는 알맹이가 없어 공허함만 남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더라도 맥락에 맞춰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더 편할 수밖에 없다.


한편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듣는 이의 기분을 고려하여 말을 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게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경우가 많아 마음을 주고 가깝게 지내고 싶을 때가 많다. 가끔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는 참새처럼 마음을 콕콕 찌르는 말들을 옆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별것 아닌 거 같아도 그런 말들이 쌓이다보면 어느샌가 내 마음에 작은 구멍이 나는 순간들이 있다. 굳이 그런 사람들을 옆에 둘 필요가 있겠는가. 항상 “그럴 수도 있지”라며 은은한 위로를 전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많다.


가만 보면 말은 실체를 가진 대상인 것 같기도 하다. 말에는 무게가 있다. 어떤 말들은 내뱉자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동안 입 안에 머금고 있기도 하고, 어떤 말들은 너무도 가벼워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내뱉고는 '아차'하기도 한다. 말에는 온도도 있다. 어떤 말들은 너무 차가워서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곧장 주변을 싸늘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말들은 따스하고 포근하여 듣는 이에게 심심한 위로를 주기도 한다. 기왕이면 무겁지 않고 따뜻한 말들만 하며 둥글게 살고 싶지만, 우리 모두 다 비슷비슷한 사람인지라 가끔은 차갑고 가시돋힌 말들을 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이거나 무거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 말들은 내뱉는 이에게도 상처가 되어 한동안 마음 속에서 찜찜하게 맴돌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싫은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내과 실습을 돌던 중 간암을 다루는 교수님의 외래 진료에 참관하였던 적이 있었다. 정해진 외래 진료 시간 속에서 환자들이 끊임없이 밀려오니 교수님의 말씀은 빨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환자의 이름을 물어보며 진료를 시작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료실 문이 닫히고, 환자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말을 시작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주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여야 할 때가 그렇다.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암이 더 전이가 되었네요...”, “이 상황에서 더 치료하는 건 환자분에게 더 고통만 될 겁니다.” 이런 말들이 나오면 별안간 다른 세상에 선 듯한 기분이다. 진료실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고, 산소는 누가 다 들이마신 건지 자꾸만 숨이 턱턱 막힌다. 흐느끼며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어오는 보호자나 환자들도 있고, 외려 더 안타깝게 담담히 고개만 끄덕끄덕하며 멍하니 계시는 분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교수님은 환자와 보호자를 달래가며 못다한 말들을 마저 전할 수밖에 없고, 상처가 되는 말들을 반복하여 전하는 교수님의 얼굴에는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남에게 선고를 내리며 마지막을 전하는 일상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참관 시간이 다 되어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문득 처음 뵈었을 때의 권위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냥 정보만 전하며 “그렇습니다”하고 끝내버릴 수도 있는 일을, 환자와 함께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어렵게 말을 전하던 교수님의 모습은 아직도 나의 눈에 선하다. 


아무쪼록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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