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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May 09. 2021

모두가 나에게 냉담한 것만 같아도

고작 그거

11월 중순 즈음 대학병원 내과계 중환자실에는 20대 환자들이 종종 찾아온다. 수능 시험 때문이다. 수능 시험을 치른 후 원치 않은 결과를 마주하고는 한동안 우울감에 빠져있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로부터 그 말을 듣자마자 왜 ‘고작 그거’ 때문에 삶을 마감하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친구는 나에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실패와 좌절에 대해 무얼 알겠냐고 하였다.


나도 모든 일이 늘 뜻대로 되었던 건 아니다. 수능 시험에 실패한 적도 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수능 시험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가채점을 하였는 데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은 뒤로 한 채 주변 사람들의 불필요한 위로에 애써 괜찮다고 답하며 겨우 잠자리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 말똥말똥한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분한 마음에 주먹으로 침대를 여러 번 내려쳤던 밤. 십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날의 참담한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속상한 날들도 많았다. 어쩌어찌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군대를 전역한 후 다시 전공을 바꿔 대학생활을 새롭게 시작했던 터라 남들보다 늦은 건 아닌지 많이 초조하였다. 낭만 가득한 청춘의 대학생활 따위는 없었다. 대학교 축제 참여 경험 전무. 한번은 학교 축제날에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축제를 한껏 즐기고 돌아오던 동기들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시끄러운 응원가 소리,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알코올 냄새, 그리고 일제히 맞춰 입은 빨간색의 대학교 티셔츠. 동기는 나에게 어디 가느냐 물었고 나는 잠깐 약속이 있어 다녀오는 길이다고 멋쩍게 답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운이 좋아 의과대학에 편입학하게 되었다.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달려와 도달한 의과대학인데 여기도 다른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모두들 비슷한 걱정들을 안고 살고, 비슷한 부분에서 행복해하고, 비슷한 부분에서 슬퍼한다. 정말이지 행복은 성취보다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문제인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상투적인 표현은 조소 섞인 말투로 내뱉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의 사회가 되었다.


수능이 막 끝난 11월 중순, 친구가 일하는 중환자실에 한 환자가 입원하였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친구였는데, 이맘때쯤 찾아오는 친구들과는 달리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는 아니었다. 수능 몇 주 전부터 목에 있는 림프절이 붓기 시작하였고 발열과 피로감을 느꼈다. 가벼운 감기인 줄 알았지만 기침을 하거나 다른 호흡기 증상은 나타나지는 않았다. 병원에 가볼까 하였으나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을뿐더러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괜히 병원에 갔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수능도 꼬일 때로 꼬여버리는 게 아닌가. 가뜩이나 이번이 두 번째 수능이었다. 친구들은 대학 생활을 하며 하하호호하고 있을 시기에 이 악물고 버틴 일 년인데 이마저 실패할 순 없었다. 그렇게 환자는 이 주가 넘는 시간을 버텼고, 상태가 점차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수능 시험을 본 이후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병명은 기쿠치병이었다. 기쿠치병은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괴사성 림프절염으로 발열과 피로감 등 여러 전신 증상을 동반하지만 비교적 양호한 경과를 보여 대부분 저절로 호전된다. 하지만 환자의 경우 통상적으로 보고된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림프절이 커졌고, 커진 림프절은 기도를 막아 호흡을 방해했다. 결국 상태가 점차 악화되었고 의식도 떨어지는 상황이라 중환자실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렇게 입원을 하게 된 후 어느날, 의식이 몽롱하였던 환자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필요한 처치를 수행하고 있던 나의 친구에게 말했다.

   "선생님, 산다는 게 뭘까요? 공부 고작 그게 뭐라고..."

어린 학생의 입에서 나온 초연한 질문에 친구는 “그러게. 그게 뭐라고...”라고 답한 뒤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테니 힘내자며 학생을 달랬다.


삶에는 다양한 어려움이 있는 걸 안다. 입시의 실패, 깨져버린 가족 관계, 찢어질 듯한 가난, 상처가 되는 말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일 텐데 스스로 그 공포의 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심정을 차마 다 헤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공부 때문에 삶을 마감하는 건 너무 아쉬운 선택이다. 공부는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 중 한 가지일 뿐이다. 공부를 잘 못하여도 성공한 사람은 이 세상에 수두룩하다. 공부 하나 잘한다고 으스댈 일도 아니다. 누구는 공부에 재능이 있고, 누구는 장사에 재능이 있고, 다른 누구는 투자에 재능이 있다. 누군가는 재능이 있어도 불행한 반면 다른 누군가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어도 행복하다. 나는 병원 생활을 하며 재능이 있어도 불행한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 본인이 일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음에도 얼굴에는 늘 근심이 자욱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내는 교수님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어도 “나는 공부에 재능이 없는 건 아닌가”하며 한숨을 푹푹 내뱉는 친구들. 뛰어난 성취를 이루고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하여 무조건 행복한 건 결코 아니다.


행복할 일들은 많다. 봄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창틈으로 포근하게 스며드는 햇살들, 길가에서 여유롭게 늘어져 있는 고양이들, 이른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들, 추운 겨울날 자판기에서 꺼내 마시는 300원짜리 율무차,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들, 친구와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농담들, 무심코 들어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감각적인 음악들. 모두가 나에게 냉담한 것만 같아도 마음을 담아 둘러보면 나를 따뜻하게 하는 것들은 늘 주변에 있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마음에 품고 다니는 석가모니의 말이다. 인생은 고단한 것이다. 고단한 인생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지는 각자의 마음에 달렸다. 살다보면 내 인생의 전부인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 일들이 허다하게 많다. 삶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면 따뜻한 차를 내어온 후 창가에 앉아 찬찬히 생각해 본다.

   '고작 그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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