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미지근하고, 느리게 움직이는 진흙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파묻는다. 손가락 하나도 들어 올릴 힘이 없다. 혹은 그러고 싶지가 않다.
‘지쳤어, 지쳤어, 지쳤어.’라는 말이 마치 떨쳐낼 수 없는 노래 가사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울린다. 몸 이곳저곳이 긴장된 채 아프지만 도무지 그 아픔에 신경을 쓰거나 돌볼 여력이 없다. 시끄럽게 울리던 머릿속의 목소리가 점차 진흙의 수렁 속에 파묻히듯이 옅어진다. 내 머리가, 머릿속의 생각이, 혹은 나 자신의 자아라고 불리는 것이 부드럽고, 미지근하고, 느리게 움직이는 진흙 속으로 서서히 잠겨든다.
한편 몸은 무언가 무형의 것으로 변해 녹아내린다. 내 몸이 녹아내린 자리에는 얼룩이 남게 될까.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는 사람 몸 형태의 얼룩. 괴담의 소재라고 될 법하다고, 진흙에 잠긴 나를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생각한다.
괴롭다. 괴롭기도 하거니와 이 괴로움이 쉽게 떨쳐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더 힘들다. 아픔과 괴로움이란 언제 끝날지 알고 있을 때 견디기가 한층 수월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이 괴로움이 언제 끝날지는 차치하고 도대체 끝나기는 하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이 고통이 내가 살아 숨 쉬는 내내 계속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뱃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토하고 싶어진다. 남은 평생이 무기력과 괴로움의 순간들로만 채워져 있다면 어쩌지? 다시는 신나고 밝은 순간을 맞지 못한다면?
이 괴로움은 무엇일까? 슬픔일까, 불안일까, 화일까, 두려움일까? 플루칙의 감정의 수레바퀴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나는 지금 내 괴로움의 정체조차 알아낼 수가 없다. 마치 낚싯줄처럼 질기고 철망의 철사처럼 가시가 돋쳐 있는 가늘고 튼튼한 실이 도무지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엉켜 시커멓고 큰 공이 되어 있다. 그 공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간다. 나는 그 공에 먹혀 버릴까 봐, 그 가시덤불의 혼란 속에 완전히 갇혀 버릴까 봐 두렵다.
삶은 번잡하고 자질구레하고 추레하기까지 하다. 그런 면이 기본적으로 있다. 이미 괴로움에 사로잡힌 나는 그 기본적인 삶의 측면을 소화하지 못한 채 살아내지 못하고 끙끙거린다. 그동안 그래도 애쓰며 살아왔다고, 삶의 순간을 허투루 허비하지 않고 나를 지켜보며 알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갑자기 찾아와 내게 달라붙은 무기력에 나에 대해, 삶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전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지식도 경험도 확신도 다 잘못되어 버렸다. 내 성공의 경험들은, 행복한 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