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찾은 나만의 장소
노란 비옷을 조심스럽게 벗는 모습을 카페 유리창 안의 점원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쳐다보았다. 주문을 할 때 당연한 듯 비 이야기를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기세로 세찬 비가 말 그대로 퍼부었고, 시원한 카페 안에 안전하게 머물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범 같은 미소가 오갔다.
작은 골목을 뒤덮듯이 쏟아붓는 빗소리가 가득했다. 홀딱 젖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약간의 우월감에 젖어 구경하면서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시나몬롤을 뜯어먹었다. 감각이 한층 진해지는, 낯설고도 친밀한 여행의 순간이었다.
치앙마이의 카페들을 한 문장으로 소개하자면 '어떻게도 규정할 수 없음'일까? 시장 바닥에 간이 의자를 놓은 '카페 보란' 집이 있는가 하면 노출 콘크리트에 큰 유리창을 갖춘 모던한 분위기의 카페도 있다. 따스한 느낌의 나무 탁자에 아기자기한 골동품을 갖춘 곳도 있고, 넓은 정원에 터무니없이 큰 나무들이 우거진 곳도 있다. 어느 카페에서는 흙바닥을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는 병아리의 뒤를 쫓는 엄마 닭의 육아를 구경할 수 있고 또 다른 카페에서는 별채에 홀로 앉아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본업은 화가인 주인장의 작품을 전시해 두고 판매하는 곳도 있고, 차분한 색조의 부드러운 리넨 천으로 만든 옷이 가득 걸려 있어 옷가게인지 카페인지 헷갈리는 곳도 있다.
커피 맛 또한 천차만별이다. 우선 에스프레소에 연유를 넣은 에스옌(에스프레소 옌의 줄임말이다)은 대세로 자리 잡았는데, 우유를 넣은 라테와는 전혀 다른 풍미다. 요약하자면 독하고 진하고 달다. 여기에 기본 아메리카노에 여러 시트러스류 주스나 코코넛 워터를 층별로 쌓은 커피도 유행인지 그쪽 메뉴도 상당히 다양해졌다. 요즘에는 본격적인 바에 바리스타와 마주 앉아 콩 종류를 고르고 전문적인 손길로 내린 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도 많아진 모양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모든 메뉴를 ‘빤’으로 즐길 수 있다. ’빤’은 말하자면 얼음과 함께 갈아주는 프라푸치노 같은 것인데, 진하고 독하고 단 치앙마이 커피는 빤으로도 잘 어울린다.
그곳만의 시그니처 메뉴를 선보이는 카페도 많다. 지난겨울 가장 자주 찾았던 해자 안쪽의 캐럿 카페에서는 생크림에 빵가루를 뿌려 거의 케이크 느낌이 나는 캐롯 넘버 원과 시원한 아메리카노에 향긋한 잼을 넣고 블루베리를 경단처럼 꽂은 꼬치를 얹은, 쌉쌀하고 새콤하고 달큰한 맛의 캐롯 넘버 투가 있다. 게다가 스무디로 분야가 넘어가면 심상치 않은 각종 조합의 여러 특이한 스무디들이 넘쳐나서 메뉴를 한참 들여다보며 고민을 해야 하는데 제법 호기심과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지금까지 가장 맛있었던 조합은 서쪽 해자변의 작은 스무디 가게에서 하는 오이와 키위, 파인애플이었다.
카페 주인장과 직원들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틀 연속 두 번만 찾으면 단골손님이 되어 무람없는 친구 대접을 해 주는 주인장이 있는가 하면 아주 겸손한 태도로 예의를 차려 손님 또한 두 손으로 공손하게 커피를 받게 하는 주인장도 있다. 호기심이 많은 젊은 직원은 우리가 한국 사람인데 태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티를 내기만 하면 갑자기 수줍음을 버리고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한다. 한 동네의 카페는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지 내가 앉아 있던 오전 내내 동네 사람들이 오가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내 태국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자주 가던 카페의 직원이었다. 그녀는 내 본명이 무슨 뜻인지 묻고 곰곰이 숙고하더니 조심스럽게 이름을 제안해 주었다. (내 태국 이름은 브런치 필명으로 쓰고 있는 와리วารี다.)
마음속에서 몰래 만든 ‘가장 카페 사장에 어울리는 사람’ 목록에서 1위를 차지한 주인장 역시 치앙마이에서 만났다. 내가 만든 기준은 이렇다. 카페를 자신과 닮은 개성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쓸데없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손님에게 간섭하지 않지만, 질문을 하면 진지하고 솔직하게 답한다. 손님을 빤히 보고 있지 않아도 기척을 알아채 필요한 것을 가져다준다. 이곳에 있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어떻게든 전달한다. 그분은 이 모든 기준을 거의 숨 쉬는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자연스럽고 힘들이지 않고 해냈는데, 그 예술 같은 움직임은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2년 만에 그 카페를 다시 찾았을 때, 사장님은 우리 모두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여 불러 주었다. 여행자로서 잠시 스치며 아주 떠나온 줄 알았던 그 장소에 나를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여행의 순간들이 내 안의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는 것처럼 그곳의 어딘가에도 내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치앙마이에서는 구글 별점이 높은 카페나 한국인들 사이에 소문이 좋은 카페는 제쳐 두고, 나만의 숨겨진 카페를 찾아보자. 카페의 분위기도, 커피맛도, 주인장의 성품도 내 취향에 딱 맞는 카페다.
오로지 커피맛이 중요하고 다른 것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도, 어쨌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커피의 세계를 더 넓히고 싶은 사람도, 말은 통하지 않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온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도, 타이라는 나라를 조금 더 깊이 알고 싶은 사람도, 혹은 그저 낯선 도시에서 나만의 공간을 찾아 내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은 사람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다채로운 치앙마이의 카페 정글 어딘가에 한 군데는 꼭 있을 것이다. 그렇게 찾은 그곳은 타이라는 나라와 나 사이에 아주 사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내게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