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답장
궁금해졌습니다. 유로파는 책 읽을 때의 습관이 있나요? 우리는 ‘책’이라는 카테고리로 대화의 교집합이 생겼잖아요. 서로 다른 모임에 속해 있었지만 각자 독서모임도 꾸준히 했었고요. ‘서울책보고’를 함께 가기도 했죠. 이런저런 책을 즐기는 곳에 누구와 가야 가장 재밌을까 생각하면 유로파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 유로파의 습관이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가진 독서 습관에 부쩍 관심이 생겼습니다. 책을 리뷰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서입니다. 우리 회사는 책을 다룹니다. 만들기도 하고 팔기도 하죠. 다양한 책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게 저의 일입니다.
빠밤!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우리는 상품을 살 때 흔히 누군가의 리뷰를 살펴봅니다. 책도 상품이죠. 그렇다면 누군가의 리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우리는 출판사가 아니기에 서평단을 모집할 만큼 재고가 넉넉하지 않아 어떻게 리뷰를 전할까 고민했습니다. 많은 책방에서 책 리뷰를 다룹니다. 입고한 작가가 넘겨준 정보를 꼼꼼히 읽고 소개하기도 하고 진정성 있게 샘플 책에 손글씨 리뷰를 남기기도 하죠. 우리 회사에는 어떤 리뷰가 어울릴까 오래 고민 했습니다. 홍대병이 있어서 남과 같은 방법은 쓰기 싫었거든요. 실패할 일 없는 정석적인 방법이라 하더라도요. 하지만 처음은 얌전히 블로그에 책 리뷰를 쓰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이것에만 머리를 쏟기에는 고민해야 할 다른 업무가 상당히 많았고 정석적인 방법을 썼을 때는 얼마나 반응이 오는지의 통계가 필요했습니다. 매주 책을 읽고 리뷰를 남겼습니다. 책을 읽는 건 재밌지만 글을 쓰는 건 너무 어렵더라고요. 휴. 왜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별개일까요. 아, 말하기도요.
회사 블로그지만 조금 개인적인 시선으로 리뷰를 남기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는 덕질을 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구절은 사심을 담기도 하면서요. 블로그의 목록이 채워질수록 매주 어떤 책의 리뷰를 남길지의 새로운 고민이 생겼습니다. 입고되는 책은 아주 많고 주 1회의 리뷰는 아쉽더라고요. 그렇다고 1일 1리뷰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회사의 촬영팀과 잡담을 나누던 중 이번에 입고 된 책 이야기로 불타올랐습니다. 이건 띵작이니 꼭 읽어야 한다. 소개한 사람 중 재미없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회사는 꾸준히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지만 단순히 책만 소개하는 콘텐츠는 없다는 사실이요. 책을 매개로 한 2차 3차의 영상은 있지만 1차인 단순 책 소개 영상이 없었습니다. 오호라. 누군가를 앉혀서 책 소개를 하게 해야겠다!
네. 그 누군가가 제가 되었습니다.
블로그도 쓰고 유튜브도 찍게 되었어요. 하하. 얼마 전에 첫 회차를 찍었는데 머리가 새하얘지더라고요. 준비한 소개말이 많았는데 하나도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촬영팀은 저에게 ‘프로 유튜-바-’가 될 수 있다며 응원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새하얗게 된 뇌가 방패처럼 모든 응원을 튕겨냈습니다. 뭐,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거니 생각해요. 영상에 찍힌 책은 전부 제가 소장한 책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제 소장 책을 소개할겁니다. 읽어보고 좋은 책을 소개하고픈 욕심도 있고 읽어보지 않으면 제대로 소개할 수 없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을 찍을 때 책을 어떤 형태로 들고 가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책을 깨끗하지 않게 읽거든요.
독서 모임을 할 때 별도의 책 커버를 사면서까지 책을 소중하게 읽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페이지를 접거나 밑줄을 긋는 건 상상도 못 하는 분이 꽤 많았습니다. 그 아래?단계로는 인덱스 테이프를 붙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책의 손상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모습이었죠. 독서 노트를 따로 마련해서 필사하는 분도 많았습니다. 다들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조심히 읽었죠.
저는 전자책을 애용했습니다. 핸드폰으로 읽으니 무게가 더해질 일이 없었고 핸드폰으로 밑줄을 치고 표기를 하니 책이 더러워질 일도 없었죠. 그래서 그때는 책을 아끼고 아니고를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하지만 종이책을 사기 시작하면서 제가 꽤 더럽게 책을 읽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날 때 빼서 읽고 또 넣고 또 빼고 또 읽고. 한 자리에서 진득이 책을 보기보단 틈틈이 읽는 타입이라 가방의 여러 부산물과 책이 부딪칩니다. 카페에서 읽을 땐 멀티가 안되어 커피를 쏟거나 디저트 부스러기가 묻기도 했죠.(하지만 디저트는 포기할 수 없어요.) 마음에 드는 페이지는 별생각 없이 아래든 위든 페이지를 접고 무언가 생각나면 책에 바로 적기도 했습니다.
요즘의 습관은 떡메모지(메모 패드 혹은 노트 패드라고 부르더라고요.)에 페이지 번호를 남기고 생각나는 걸 씁니다. 포스트잇은 뗐다 붙였다가 좀 귀찮아서 메모지에 정착했습니다. 문장을 필사하진 않습니다. 꼭 그 문장이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그 페이지를 읽었을 때 생각나는 여러 가지를 적습니다. 그렇게 메모지를 페이지 사이사이에 책갈피처럼 끼우며 책을 읽습니다.
영상에 보이기 너무 너덜너덜할까 봐 인덱스 테이프에 도전해봤습니다. 색색깔의 예쁜 인덱스가 책 옆면에 있어 깔끔하고 예쁘더라고요. 하지만 생각을 남기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여러 문구류를 뒤적였습니다. 책의 가로 길이를 다 덮을 만큼의 길고 얇은 인덱스도 있었고 문장 테이프라고 해서 문장을 체크할 수 있는 예쁜 따옴표 모양 테이프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인덱스도 문장 테이프도 표기를 위한 것일 뿐 메모를 남기는 역할은 아니잖아요. 그렇게 턱을 괴며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고 있을 때 회사의 디자이너분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이아님도 문구류 덕후시군요! 저도 그런데! 근데 이아님은 쓰고 싶은 거 만들어 쓰면 되지 않아요?”
이제 편지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유로파는 책 읽을 때의 습관이 있나요? 저는 제 맞춤형인 떡메모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영상에서 더럽게 보이는 걸 신경 쓰기보다 내 독서 습관에 맞는 굿즈를 만드는 거에 꽂히기로 했습니다. 재밌잖아요. 내 굿즈 내가 만들기. 그래서 유로파의 독서 습관도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만들 수 있는 거라면 만들어서 주고 싶어서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얄미운 말이지만 그게 미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작가님과의 대화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이 꽤 명확하다는 걸 들켰습니다. 캐릭터 지어질 수 있는 사람은 취향이 분명한 거라 캐릭터화가 가능한 거라고 말해주시더라고요. 실제로 길가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사진을 찍어 보내주거나 제가 좋아할 법한 책을 선물 받거나 제가 기분 좋은 소리를 지를만한 카페를 발견하면 만날 때 안내받는 일이 있습니다.
무언갈 좋아한다고 하면 이유를 함께 말하거나 근거를 대거나 앞으로 더 좋아하기 위한 계획을 말해야 할 기분에 뭔가 명확한 부분은 없어 얄밉게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하면 함께 살고 있냐 거나 함께 살 계획이 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전혀 함께 살 생각이 없는데도요. 책임감이라는 게 아주 너무 무섭거든요. 어렸을 때 룸메와 살 때는 룸메의 고양이가 있었지만 얼마 전 그 고양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선 더 크게 결심했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살지 말아야겠다고요. 나는 나도 잘 챙기지 못하는 데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일은 너무 어불성설 합니다. 함께 살 때 받는 행복을 돌려줄 자신도 없고요. 그래서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길 가다 만나는 고양이에게 몰래몰래 시선이 뺏기거나 고양이 굿즈를 몰래몰래 사 모으지만요.
유로파는 어떤가요? 좋아하는 것이 명확한가요? 새로운 도전을 즐긴다는 것은 도전을 좋아하는 것으로도 보이지만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이제까지 어떤 도전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얻어왔는지도 궁금합니다. 천천히 편지가 오가며 궁금이 풀리면 좋겠습니다.
저번에 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로파가 왜 술을 좋아하는지는 모르네요. 술 이야기가 반복돼서인지 편지에서 조금 술 냄새가 나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물어보고 싶습니다. 알쓰라서 말은 못했지만 술은 좋아합니다. 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맛이 좋아요. 그래서 수제 맥주를 좋아합니다. 어떤 맥주는 향긋하기도 하고 어떤 맥주는 달콤씁쓸합니다. 또 어떤 맥주는 아주 청량하고요. 수제 맥주의 라벨도 좋아해요. 맛을 시각화하거나 브랜드의 정체성을 시각화한 라벨은 하나의 예술품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간 바의 마스터는 유로파에겐 느끼했군요. 소년미를 원하는 유로파의 취향. 잘 알아두겠습니다. 후후후. 제가 가는 몇 바의 마스터는 저에게는 괜찮은 대화를 건넸습니다. 그곳의 대화가 마음에 드는 건 오래되어도 선을 넘지 않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사이가 됩니다. 저는 그런 대화가 마스터와 손님과의 아주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해요. 이런 동네 바는 완전 캐쥬얼도 아니고 완전 프리미엄도 아닙니다. 프리미엄 바는 한번 가봤다가 외투를 맡아주는 부분부터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망쳤습니다. 유로파가 안내하는 바의 정성스럽고 순수한 대화도 기대가 됩니다.
어제 책을 한 권 샀습니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을까>입니다. 요즘 줄곧 생각하는 부분이 어떻게 하면 창작자에게 더 괜찮은 서포트를 할 수 있을까여서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업으로 삼든 부업으로 삼든 취미로 삼든 어떻게든 할 방법을 찾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모든 창작자의 가장 큰 고민은 좋아해서 시작한 창작활동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 지속할 것인가입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창작 활동을 사랑합니다. 창작자를 사랑하죠. 그들이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작품을 소비할 때의 기쁨은 정말 행복하죠. 그래서 늘 어떻게 하면 그들이 계속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도울까 고민합니다.
이게 내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책을 이제 11페이지 정도 읽었습니다. 페이지 마다 생각이 멈추지 않아 책 사이에 메모갈피가 많이 쌓였네요. 책의 진도가 나가질 않는군요. 생각을 적는 것도 좋지만 유로파와 생각을 나누고 싶어 편지를 썼습니다. 이제 다시 책을 좀 읽고 와야겠어요.
명확하게 밝혀졌군요! 저는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와아! 원래도 명확했지만 더욱더 명확해지니 말의 길을 잃었습니다. 제가 만약 일잘러였다면 콘텐츠의 고민도 서포터의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둘 다 제가 좋아하는 일이지만요. 다행히 만났던 대부분의 회사 동료는 저의 ‘큰일 났어요.’를 잘 받아주었습니다. 하도 많이 해서 거의 추임새처럼 넘기더군요. 지금 회사의 동료들과는 아침 인사를 “큰일 났어요.”로 주고 “큰일 아니에요.”로 받습니다. 그렇게 말미에 물결을 치며 웃습니다. 그리고 어떤 큰일인지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큰일이 아닐지 의논합니다. 가끔 제가 출근하지 않는 날은 조용해서 어색하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저는 회사에서 사랑받는 존재인 걸까요? 후후.
경험하지 못해서 수습하지 못하는 내 무지를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봅니다. 유로파처럼 말이에요. 나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인데 그것을 긍정의 힘으로 극복하려 한다고 착각하죠. 저는 일을 많이 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이쿠. 세상에 태어나버렸네! 이왕 태어난 김에 하고 싶은 일 다 해버려야지!” 하면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로요. 하고 싶은 일이 끊이지 않다 보니 해야 할 일은 뒷전이 되기 일쑤였죠. 매번 하고 싶은 일을 하느라, 해야 하는 일을 놓쳤습니다. 하지만 주변인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낸 모습만 봅니다. 당연히 하고 싶은 일을 해내려면 해야 하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저는 그렇지 못했으니 하고 싶은 일도 일부분만 운이 좋게 성공했죠. 그 속에선 허세가 많이 자랐어요. 허세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쭉 나올 소재이지 않을까 합니다. 여하튼 그나마 성공했던 이유를 살펴보자면 절대 제가 긍정마인드를 가져서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일을 기획할 때 잔걱정이 많고 생각에 생각의 꼬리가 붙습니다. 가정법 망상으로 말도 안되는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도 많죠. 출근길에 갑자기 거대 코끼리가 나타나서 지하철을 얍얍하면 영상을 먼저 찍어야 하나 회사에 늦는다고 먼저 전화해야 하나 이런 이상한 시뮬레이션이요.
그렇다면 어떻게 성공했느냐. ‘운’ 좋게 그때마다 현실감각이 충실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항상 옆에 있었던 건 아니니 그것을 운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나의 머릿속 코끼리를 지워주고 나의 해야 하는 일을 하게끔 도와줬죠. 나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긍정적인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일이 실행되게끔 도와주는 사람이야 말로요. 우리가 과거에 함께 했던 뉴스레터 기억나나요? 그 뉴스레터 프로젝트에서 유로파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머릿속에만 떠다니던 ‘아, 뉴스레터 하고 싶다.’를 현실로 끌어내 준 존재였죠. 내 생각을 흥미롭게 들어주고 일정과 목표를 제시해주고 실현의 과정과 실제 서비스까지 모두 도와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나는 유로파를 운으로 만났지만, 운과 인연이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우리가 편지를 나누면서 다른 숨겨진 교집합을 나눌 부분도 기대가 됩니다. 책 이야기도 더 나누면 좋겠고요. 따듯한 여행 이야기도 좋습니다. 유로파의 의상 취향도 궁금합니다. 여행지에 챙겨가는 옷은 있는지 평상시에는 어떤 기준으로 옷을 사는지. 운동 이야기는 절대 교집합이 없을 예정입니다. 네. 방금 가정법 망상도 해보았지만 교집합이 생길 가능성이 없군요. 좋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조금, 여행지에서 조금, 여행을 다녀와서 조금이 담길 다음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