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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Nov 06. 2022

알쓰고요. 글씁니다.

첫 번째 답장

안녕하세요. 유로파. 제게 답장을 재촉하는 얼굴과 헤어진 지 하루가 지났습니다. 텀블벅으로 후원받은 펀딩책의 최종본을 작업하다 잠시 맞춤법 검사기가 오류가 난 틈을 타 답장을 씁니다. 저는 과거에 이미 한 권의 편지 책을 만들었습니다. 우연히 시작한 편지 책이었지만 꽤 재밌었습니다. 한 사람을 깊게 이해하기 좋아하는 저에게 편지는 좋은 매개체였습니다. 편지 책을 시리즈로 내겠다는 빌미로 제가 새로 이해하고픈 사람을 생각하다 유로파에서 멈췄습니다. 우린 알고 지낸 지는 오랩니다. 하지만 정말 알고 지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막연히 다른 세계의 종족쯤으로 생각했거든요.


제 머릿속의 유로파는 저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입니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하하 호호 떠들며 손잡고 매점을 다니거나 유행하는 아이돌의 이야기를 하거나 한창 방영 중인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여기저기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을 모습이 떠오르고요. 넓고 많은 곳을 다니며 세상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구나 눈을 반짝이며 다녔을 모습이 상상됩니다. 무난히 입사한 회사에서도 동기들과 어울리며 사담을 나누고 일 처리도 똑 부러지게 잘하며 상사와도 잘 지낼 모습이 예상됩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바쁘게 자기 계발과 운동을 하는 모습도 떠오르고요. 


이것은 온전히 저의 상상입니다. 저에게 유로파의 이미지는 안정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밝고 활기찬, 사랑스러운 인물입니다. 






사랑스러운 존재는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고 만족해집니다. 그래서 그동안은 보기만 했습니다. 갑자기 유로파가 궁금해진 건 유로파가 저를 궁금해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나중에 생길 사고를 미리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덕분에 입시 미술을 하던 시절의 별명은 ‘수습의 여왕’이었습니다. 일단 그려놓고 문제가 발생하면 남은 시간은 모두 수습하는 데 할애했거든요. 그리는 시간보다 수습하는 시간이 더 길었죠. 지금도 회사에서는 하루에 한두 번씩 꼭 사고를 치고 근무 중 남은 시간을 수습하는 데 씁니다. 유로파가 문제 사항을 고려하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시간에 저는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죠. 저의 실행력의 근원이 궁금하셨나요? 정답은 ‘수습하는 시간을 가진다.’ 입니다.


수습에 관해선 하나의 변명이 있습니다. 문제 사항을 미리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생각이 경험을 뛰어넘지 못해서입니다. 실행해 본 만큼만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이미지를 로드할 때 위에서 아래로 점점 로딩되잖아요? 그런 느낌입니다. 경험해본 만큼만 머리에 로딩됩니다. 그래선지 어느 회사에 다니든 사무와 현장을 함께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무만 하면 현장이 로딩이 안 돼서 사고가 생기고 현장만 하면 사무가 로딩이 안 돼서 사고가 생겼거든요. 수습의 여왕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고는 수습하지 못합니다. 사무와 현장을 함께 관리하면 머리와 몸이 두 배로 힘들지만 둘 사이의 연결점이 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두 쪽 다 이해하고 있으니 두 쪽 다 대변할 수 있는 거죠.






주변에선 저에게 일 바보라 합니다. 기분 나쁜 말은 아니지만 뭔가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봐도 일 바보인 구석이 없습니다. 퇴근하면 집에 돌아와 간단히 밥을 차려 먹습니다. 그리고 룸메와 한두 시간 정도 티 타임을 가지죠. 룸메는 일러스트 작가이기에 나눌 이야기가 많습니다. 제가 만들고픈 책에 그림이 필요한 경우나 그림 관련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픈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서로의 직장에서 생긴 일을 푸념하기도 하죠. 응원을 주고받기도 하고요. 서로가 발견한 작품에 대해 열띠게 토론도 하고 덕질하는 작가의 자랑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티타임이 끝나고 나면 작업방에 앉아 책을 편집하거나 읽거나 씁니다.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이 되면 이제 유튜브 타임입니다. 많은 OTT 서비스가 있지만 유튜브 프리미엄 말고는 저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보는 방송만 해도 8시간이 넘는 경우가 꽤 있거든요. 앉아서 유튜브를 보다 졸리면 유튜브를 켠 채로 눕습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아침이 되어 있고 유튜브는 아직 돌아가고 있죠. 이 루틴 아닌 루틴은 꽤 오래되었습니다. 가끔 약속이나 워크숍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집에서의 활동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착된 건 아닌데 달리 바뀔 게 없네요. 유로파의 퇴근 후 스케줄도 궁금해집니다. 새로운 걸 도전하기 좋아하는 유로파는 퇴근 후 어떤 걸 하나요?


유로파는 지난 언젠가의 제 생일에 맥주캔을 넣으면 시원해지는 기계를 선물로 줬습니다. 혹시 기억하나요? 그 기계는 부엌 쪽 어느 서랍에 있지만 아직 사용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하나는 집에서 술을 마실 일이 거의 없고 하나는 맥주 한 캔을 다 마시기 전에 잠들기 때문입니다. 밖에서는 술을 마십니다. 맥주 한 잔으로 세 시간 동안 마십니다. 알쓰니까요. 알쓰는 술을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좁습니다. 소주와 와인은 넘보지도 못하죠. 이런 이유에 비해서는 바를 좋아합니다만, 바는 대부분 칵테일 커스텀이 가능하고 마스터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해서입니다. 술을 빠르게 마시지 않아도 되고요. 누구와 가도 괜찮을 곳이 바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곳이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다음 약속지는 어딘가의 바로 할까요? 술을 좋아하는 유로파와 알쓰인 제가 함께 가기 딱 좋지 않나요?


이런 저도 가끔 맥주가 당길 때가 있습니다. 수제 맥주를 좋아하는 데 새로운 라벨의 맥주가 보이면 궁금해서 마셔보고 싶어요. 욕심 그득그득으로 편의점에서 4캔 만원을 집어 옵니다. 남은 3캔을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는데 왜 4캔의 욕심을 버리지 못할까요. 여하튼 맥주를 마시기 전에 모든 잘 준비를 끝내 놓습니다. 언제 잠들지 모르거든요. 밖에서 마시는 술은 집에 가야 한다는 귀소본능 덕분에 엄청 취하지 않지만 집에서 마시는 술은 누우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쉽게 빨리 취합니다. 취하면 바로 잡니다. 이 세상에 알람이 없었으면 전 아마 오늘 지각했겠죠.






성질이 급해서 결론부터 말하길 좋아합니다. 대화에서 결론을 이야기하고 서로 질문을 통해 과정을 주고받는 방식을 통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요. 성질이 급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을 꾸미거나 밑밥을 깔거나 무의미한 수식어가 들어간 여러 쿠션어를 쓰는 사람과는 대화가 쉽지 않습니다. 되면 된다. 안 되면 안 된다. 왜 되면 되는대로 여러 예쁜 말이 필요하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여러 죄송한 말이 필요할까요. 물론 과정도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서로 질문을 나누며 과정을 이해하는 거겠죠. 질문은 본인이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때문에 필요한 말만 전달하기 편합니다. 상대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이 말 저 말 나열하는 건 저를 답답하게 합니다. 이미 결론이 나 있다면 결론을 전달하고 질문을 통해 궁금증을 해결하면 됩니다. ‘여러 번 시도 해봤지만 되지 않았고 되지 않아서 또 다른 방법을 시도 해봤지만 그것마저 되지 않아 아주 깊이 고민해 보고 여러 방면으로 조언도 구해보았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진행이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말을 전달 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좋은 방법이 있다면 꼭 알려주세요.’라는 말은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미 사고를 쳐 부렸고! 얼른 빨리 수습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큰일 났어요.”라고 결론부터 말합니다.


유로파와의 대화에서 크게 불편한 건 느끼지 못했습니다. 말씀대로 익숙해진 걸까요 아니면 그러려니 하게 된 걸까요. 떠오르는 모습은 자주 웃는다는 거? 저는 서로 질문이 오가는 대화를 좋아하는데 유로파도 질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어보는 것도 물음 당하는 것도요. 편지를 보니 물어보는 것도 물어 버리는 것도 좋아하시는군요.






사람에겐 환경 적응 범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동네에 가도 금방 적응하는 사람과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죠. 유로파는 그 범위가 세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응 범위뿐 아니라 행동 범위, 시야 범위까지 큰 사람인 거죠. 어렸을 때부터 세계는 넓으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있지 말고 넓은 세계에서 시야를 트고 오렴 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외국에 한 번 나갔다 오면 시야의 범위가 달라진다고. 세상을 보는 마음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진짜 달라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딜가든 제 시야는 항상 좁더라고요.


급발진해서 말하지만 저는 여행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여행지에 가면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이나 거대한 문화유산보다 거기에 있는 혹은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 먼저 호기심이 갑니다. 그 나라의 대중교통을 타면 현지인을 만나게 되잖아요. 그럼 저 사람은 출근길이구나. 가 먼저 보입니다. 그 나라의 카페에 가면 현지인 직원을 만나게 되잖아요. 그럼 저 사람은 여기서 근무 중이구나. 가 먼저 보입니다. 그 나라의 공원에 가면 강아지랑 산책하는 현지인을 만나게 되잖아요. 그럼 저 사람은 강아지랑 산책하는구나. 가 먼저 보일 뿐입니다. 지구촌 어디든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말은 여행이 싫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딜가나 동네의 소소하고 사람 사는 소소함은 비슷하다는 말이에요. 


자연이나 관광지, 거대한 축제는 저에게 호기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저는 그 나라의, 그 동네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지나가다 눈에 띈 가게에 들어가서 귀여운 소품을 산다든지 직원 추천의 음식을 먹어본다든지 공원이 있으면 가만히 앉아 사람을 구경한다든지 미술관이 있으면 모르는 채 들어가서 작품을 구경한다든지 스몰 마켓이 있으면 창작자와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그런 소소한 여행을 즐깁니다. 세계를 다니며 시야가 넓어지는 것보다 저는 시야가 좁더라도 이런 소소함을 느끼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자연 속 힐링을 느끼자는 제안에 싫다고 하고 어딘가의 거대한 놀이동산을 즐기자는 제안에 싫다고 해서 제가 여행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굉장히 안타깝군요. 새로운 문화공간이나 책방, 카페를 쏘다니는 저를 안다면 오해하지 않을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업무에 여유가 없어 함께 여행 갈 시간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네요. 아쉬운 대로 당분간은 유로파의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집순이와 밖순이의 사이인 동네순이로 살아야겠습니다. 다음 편지에는 최근에 여행한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떤 동네였는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궁금합니다.






유로파는 처음 듣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저는 헬스장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제대로 운영하는 운동 센터에 가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죠. 몸으로 하는 모든 걸 못 합니다. 진짜로요. 못하니까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하지 않게 됩니다.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헬스장이나 기타 운동 하는 곳에는 등록할 자신이 없어 유튜브를 켰습니다. 맨몸 운동 영상과 요가 영상을 본 지 몇 년은 되었습니다. 작업방 한쪽에는 언젠가 꽂혀서 산 스텝퍼가 놓여 있죠. 오늘도 화이팅! 운동해야지! 하며 하는 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5분~10분 정도의 맨몸 운동 영상을 따라 하거나 유연성이 부족해 자세가 하나도 안나오지만 요가 영상을 낑낑대며 따라 합니다. 저녁에는 유튜브를 보며 스텝퍼를 굴리죠.


착한 주위의 몇 지인이 수영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공 운동은 놀이처럼 느껴진다며 추천해주기도 했지만, 자전거 타는 법도 어려운 저에겐 그 모든 운동이 어려웠어요. 후후.


아직까진 체력이 힘들다거나 모자란다는 경험이 없어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갑자기 어느 날 후회하려나요. 그건 그때 가서 수습해보겠습니다.






쓴맛을 좋아합니다. 단맛도 좋아하지만 씁쓰리미한 맛을 좋아합니다. 모든 씁쓰리미는 아니고요. 찐함과 텁텁함이 약간 추가되어야 합니다. 유로파가 알기 쉽게 예를 들자면 말벡 와인 느낌이려나요. 어렸을 때 엄마의 한약을 몰래 뺏어 먹고 반성은커녕 오히려 나도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부터 인삼 뿌리를 간식으로 먹었습니다. 꼬꼬마라 작은 크기로 똑 떼어서 주셨죠. 커서는 홍삼에 빠져 심심하면 먹고 있어요. 단맛이 추가된 홍삼도 맛있지만 단맛이 없는 홍삼도 맛있습니다. 최근에 한방차 레시피북을 만들면서 많은 재료를 알게 되어 아주 행복했어요. 한약사님이 다 맛보게 해주셔서 냠냠 맛나게 먹고 왔죠.


쓴맛은 아니지만 유제품도 엄청 좋아해서 그릭 요거트를 달고 삽니다. 하루에 한 포만 먹으라는 유산균도 가끔 두 포 먹어요. 맛이 있는데 어떻게 참죠.


그 외의 영양제류는 잘 까먹습니다. 콜라겐도 비타민도 뭐도 삼십 대가 들어서면서 굉장히 많이 선물 받았었는데 잘 챙겨 먹지 못했어요. 유로파가 챙겨준 영양제는 회사에 놓고 출근마다 알람을 맞추어 잘 먹어보겠습니다. 


다음에 언젠가 한방차를 대접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레시피북을 만들며 가끔 집에서 끓여 마시는데, 제가 끓인 거지만 아주 맛있더라고요. 몸으로 하는 건 다 못하는 저도 쉽게 할 수 있는 차 끓이기라 다행이죠. 책이 완성되면 차와 함께 선물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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