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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당벌레 Mar 25. 2024

Round 4.  어른 vs 아이의 저울질

소설 『모비 딕』

"니 감정만 중요한 게 아냐!” 내뱉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 더구나 언성까지 높았다. 날밤이가 갓 10살을 넘겼을 무렵 같다. 날 쳐다봤던 녀석의 눈빛이 10년이 지나도 생생하다. 배신감과 슬픔에다 죄책감까지 어린 눈빛.


로드킬을 당한 길고양이와 마주친 날이었다. 눈발이 실린 칼바람 추위가 매서웠던 밤. 늦은 업무를 마치고 날밤이를 픽업한 귀갓길로 기억한다. 빙판길 반 질퍽길 반에 컴컴하기까지 한 경사로였다. 조심조심 거의 내려왔을 무렵 전조등 앞에 엎드려 누운 회갈색 고양이를 겨우 알아봤다. 제법 덩치가 컸다.


이런, 하반신이 짓눌려 있었다. 흥건하게 말라붙은 검은 핏자국도 보였다. 납작하게 늘어진 하반신을 끌면서 겨우 꿈틀대고 있었다.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앞발을 날카롭게 휘두르며 험악한 공격성을 드러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듯했다. 또 치일 수 있으니 굵은 막대를 주워들고 갓길로 밀어둬야 했다.


어느새 하차한 날밤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장갑은 없었고 외투도 차에 벗어둔 채였다. 그 날씨의 그 밤에 눈길 경사 차로로 자꾸만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덤빌 듯 갸르릉 거리며 나무막대를 쳐내는 고양이와 씨름하는 아빠를 도우려 했던 건지 모르겠다. 아무려나 날밤이와 고양이 사이에서 내 시선은 혼비백산했다. 급하게 고양이를 밀어놓고 서둘러 날밤이를 태우고 자리를 뜨고 말았다.


운전 중 어지러운 사정에 신고는 늦춰졌다. 당장 급하지는 않은 상황이고 마음도 서로 가라앉혀야 했다. 날밤이는 돌아가면 안 되냐고 계속 물었다. 집으로 마저 가자고 달랬다. 맨손으로 어쩔 수 없고 위험했던 상황도 떠올랐다. 날밤을 데려다 놓고 다시 나올까도 고민했지만 혼자 두기엔 또 아직 불안했다.


귀가하고서도 그런저런 일에 날밤이는 불편했던 듯했다.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일상적 눈높이는 신고로 규격화돼 있으니 눈 감아버리는 게 아니라고 여러 번 알려줬다. 그래도 잠시나마 집으로 데려오던가 최소한 옆을 지켜주기라도 하자는 듯했다. 아빠는 혼비백산했던 장면에, 녀석은 공포와 추위와 위험 속 울음소리에 붙들려 있었다.


“니 감정만 중요한 게 아냐!” 결국 소리치고 말았다. ‘네 감정은 안다만 그렇다고 물불 안 가리면 안 된다, 게다가 아빠가 어벤저스냐’ 정도였지 싶다. 가끔 주변의 불행 앞에서 약은 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날밤이의 미래를 향한 남모를 불안함도 은근 깔린…. 녀석은 움찔했고 가만히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의 비좁았을 그때 눈빛이 날밤이를 깊이 찌르지 않았기를, 아예 무의식 속에라도 남지 않았기를 헛되이 바라며 남몰래 괴로웠다. 오래된 괴로움에서 헤어나는 법을 깨달은 건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읽으면서였다.


누구나 저마다의 ‘뇌피셜’에 붙들려 산다. 나름의 이유와 감정에 매여 물불 안 가리는 불굴의 의지로 주변 사람을 이끈 인물이 『모비 딕』의 에이해브 선장이다. 일등항해사 스타벅이 에이해브를 막아서면서 둘의 말다툼이 벌어진다.



모비 딕』 에이해브 vs 스타벅


에이해브는 모비 딕이라는 새하얗고 거대한 향유고래에게 왼쪽 다리를 절단당한 인물이다. 얼추 170년 전. 복수를 위해 모비 딕을 추격하는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와 늙은 선장 에이해브를 다룬 미국 고전 소설이다.


위험천만한 게 향유고래 사냥이었다고 한다. 향유고래는 이빨 달린 생명체 중 가장 거대하며 거칠었다. 뭉툭한 머리에 귀한 고래기름이 가득 담겨 있어 석유 시대 이전엔 움직이는 시추선이었다. 작살 대포가 없던 시절, 지난번 항해에서 에이해브는 작살을 실은 작은 보트를 내려 모비 딕에게 직접 다가갔다.


모비 딕은 폭풍우에 찢길 듯한 삼각돛 같은 꼬리를 내리치며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신의 대리인 혹은 악마의 고래로 불린 놈이었다. 음습한 주름이 진 거대하고 뭉툭한 이마, 비틀린 흰 아가리, 칼날처럼 솟은 이빨을 상대해야 했다. 포악하고 사악하며 가증스럽고 저주스럽다는, 인간의 두려움을 덧씌운 온갖 수식어가 붙은 놈과 맞섰고, 에이해브는 순식간에 외다리 신세가 됐다.


복수를 꿈꿔 오던 에이해브는 어느 성탄절 저녁 다시 피쿼드호를 이끌고 미국 동부 해안을 출발한다. 대서양 한복판에서 선원들에게 이 항해의 진짜 목적이 고래기름보다 복수임을 공표한다. 악명 높은 모비 딕 사냥은 높은 명예를 안겨줄 것이다! 제일 먼저 놈을 발견하면 빛나는 스페인 금화를 주겠다! 선원들은 열광하고 술자리는 떠들썩해진다. 오직 일등항해사 스타벅만 반대하고 나선다.



스타벅 에이해브 선장님, 모비 딕의 비뚤어진 아가리건 죽음의 아가리건 겁내지 않을 겁니다. 그게 우리가 하는 고래잡이 일에 정당한 것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저는 고래를 잡으러 왔지 선장님 복수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만약 복수에 성공해도 그놈한테서 고래기름 몇 통이나 얻을 수 있을까요? (…) 녀석은 눈먼 본능에 따라 선장님을 공격했을 뿐인데, 이건 미친 짓입니다! 어리석은 동물에게 원한을 품다니, 선장님, 신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에이해브 그놈 너머에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녀석이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는 것만으로 충분해. 나는 녀석에게서 잔인무도한 힘뿐만 아니라 그 힘을 북돋우는 가늠할 수 없는 악의도 본다네. 그 가늠할 수 없는 존재야말로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지. 모비 딕이 그 대리인이건 본체이건 내 증오를 놈에게 쏟아 부을 거야. 자네 신성모독이니 하는 말 따위는 집어치워. 태양이 날 모독한다면 태양이라도 공격할 거니까. 



3년 넘게 지구를 돌며 모비 딕을 추격한 피쿼드호. 태평양 적도에서 기어이 놈과 맞닥뜨린다. 이틀간 사투를 벌였으나 처참하게 패한다. 보트들이 박살나고 작살잡이 한 명이 또 빨려가 버린다. 에이해브도 의족이 부러진 채 간신히 구조된다. 



스타벅 늙은 선장님, 당신은 절대, 절대 그놈을 잡지 못할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일을 그만둡시다. 악마의 광기보다 더 나쁜 일입니다. 이틀 동안 추격했고, 보트가 두 번 산산조각 났고, 선장님의 다리마저 또 부러졌습니다. (…) 이 이상 뭘 더 원합니까? 이 흉악한 고래가 우리를 마지막 한 사람까지 쓸어가 버릴 때까지 계속 추적할 겁니까? 그놈에게 바다 밑바닥까지 끌려가야 합니까? 그놈에게 지옥에까지 끌려가야 합니까?


에이해브 이보게, 에이해브는 영원히 에이해브야. 이 모든 건 이미 정해져 있고 바뀔 수 없는 장면(Act)이라네. 이 바다가 물결치기 10억 년 전에 이미 자네와 나는 리허설을 마쳤어. 바보 같으니! 나는 운명의 부하야. 나는 그저 명령에 따라 행동할 뿐. 이 봐 너희들도 그 부하야. 내 명령에 따라!



작살질은 다음날에도 이어진다. 분노한 모비 딕은 거대한 머리로 보트가 아닌 본선 피쿼드호를 들이받는다. 성탄절 밤 고래기름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출항했던 선원 모두는 침몰 소용돌이에 휘감겨 적도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간다.



항해를 저울질하기


쉰 살 넘어 얻은 어린 아내를 곧바로 생과부로 만들었다며 한탄하는 에이해브그에게 냉혹한 항해와 불같은 작살질은 삶의 전부였다. 한번 출항한 포경선은 중간 기착지 없이 홀로 3~4년 동안 폭풍우의 대양을 헤맸다. 맛집 없이 임신 네 번 하고 휴가 없이 군대 두 번 가는 시간이다. 그는 40년 넘게 견뎠다. 잿빛 머리 덥수룩한 노인은 소금에 절인 마른 것만 먹으며 황무지 같은 바다를 버텼고 탁월한 실적으로 포경산업의 절정기에 우뚝 섰다.


지난번 항해 때 박살 난 보트 위에서 단검을 빼 들고 모비 딕에게 뛰어들었다. 거대하고 컴컴한 아가리가 벌어지며 단검보다 날카로운 이빨이 스친 찰나 왼 다리가 찢겨 나갔다. 놈은 그걸 씹어 으깼다. 몇 달의 귀향길 동안 선원들은 그물침대를 찢으며 날뛰는 선장을 묶어놔야 했다. 찢긴 다리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영혼을 집어삼켰고 영혼에서 흘러나온 피는 육신을 적셨다.


향유고래 턱뼈를 갈아 만든 상앗빛 의족을 달았다. 170년 전 의족인지라 충격을 받으면 자주 비틀리며 신경을 건드렸다. 쉽게 빠지면서 사타구니를 강타해 에이해브를 자빠뜨렸다. 다리가 잘려나가던 공포, 이어진 신체 통증, ‘불구’를 대하는 은근한 무시와 값싼 동정, 독불장군의 말로라는 수군거림, 상처 난 자존감과 무기력함, 타의에 의해 온 인생을 강탈당한 박탈감….


늙은 선장은 분노했다. 막막한 대양 깊숙이 정체를 숨긴 새하얀 어둠 모비 딕의 가증스러운 눈동자에 빛나는 작살을 내리꽂아 검은 피를 뿜게 한 뒤 광폭한 꼬리를 맥없이 늘어뜨린 채 떠오를 때까지 놈을 추적해 마지막 숨통을 끊어야만 했다. 복수를 통해 자기가 처한 운명의 탑을 새로 짓는 일이었다.


개신교 세계관에 붙들린 19세기 미국이었다. 빈부격차도 인종차별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에이해브는 비참한 자기 처지가 신의 의지라 여겼다. 신의 대리인 모비 딕을 향한 분노의 항해는 사적 복수 이상이었다. 압도적인 신의 질서에 맞서 새 운명을 세우는 항해였으며 자유로운 인간의 굴하지 않는 의지였다.


“모든 것을 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적도의 바다에는 뜨거운 태양빛만 가득했다. 그 창백한 빛을 찢어버리겠다는 듯 에이해브의 강철 같은 시선만 팽팽했을 때 갑판 위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절망했다.


기름을 가득 싣고 귀향하려는 선원들의 부푼 꿈, 그리고 그 가족과 투자자를 내팽개친 항해였다. 다른 포경선의 선장이 바다에 휩쓸린 아들을 수색하기 위해 단 하루만 도와달라 애원했을 때에도 차갑게 눈 돌릴 수밖에 없던 항해였다. 돛대가 상해 폭풍우에 시달렸고 전염병과 불길한 조짐이 잇따랐던 3년이었다. 결국 피쿼드호가 거대한 관이 되는 걸 감내해야 했다. 한낱 짐승의 방어 본능에게 복수를 벌이려는 뒤틀린 피해의식이 흐르는 몰락의 물길이었고 강박을 되풀이하는 파멸의 항해였을 뿐이었다.


‘한겨울 에베레스트 남서 빙벽 무산소 단독 등반’에 도전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클라이머가 있다. 한낮 기온 영하 40도. 끊임없는 크고 작은 눈사태…. 포터도, 자일 파트너도, 산소 장비도 없이 신들의 자이로드롭 같은 세계 최대 수직 얼음벽을 피켈로 찍으며 정상에 도전하는 일이다.(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 『신들의 봉우리』. 우연일지 모르지만 주인공의 이름은 ‘에이해브’(Ahab)를 닮은 ‘하브’(Hab).)


커피를 좋아하는 일상의 감정에 기대는 스타벅(Starbuck)이 이 인물을 만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당신의 가치는 절실할 것이고 고통은 비범할 것이며 인간과 신의 경계선을 정하는 위대한 도전, 그리고 죽음이 될 것입니다. 단 혼자 한다면 말입니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려면 삼겹살을 포기하면 된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자기와 가족과 지인의 목숨을 감수해야 했다. 내버리고 감수하는 것의 크기가 얻으려는 가치의 크기를 내비춘다. 에이해브는 전부 내버렸다. 얻으려는 가치는 40년 긍지를 빼앗긴 박탈감과 모멸감에 대항한 싸움이었다. 40년 근속했던 회사로부터 하루아침에 불명예 해고 통보를 받은 격이랄까.


에이해브가 내보인 불굴의 의지를 추앙하는 사람도 있고, 스타벅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다. 둘의 감정에 나름대로 이유가 없지 않다면 이 항해의 가치를 어떻게 저울질해야 할까. 어렵고 어려울 테지만 결국 나와 네가 함께 나누고 감내할 괴로움이었는지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할 일이었을까. 당시 그 항해의 가치는 보편적이었을까. 지금 우리에게는 보편적일까. 저울은 그게 될 수밖에.



후회막급에서 살아남기     


길고양이와 마주친 날 날밤이는 자기감정에 충실했다. 아빠도 내 가이드라인을 붙잡고 있었다. 두 인격체가 느꼈던 감정의 가치를 저울질한다날밤이의 연민은 우리가 함께 나눌 감정이었으며 손 맞잡을 이유로 충분한 보편적 가치였다. 아빠는 어땠을까. 정말 아들의 위험에 대한 우려뿐이었을까. 그래서 52데시벨까지 언성을 높였을까.


귀찮았다. 번거로운 감정과 쉬고 싶은 마음이 강했음을 부인할 도리가 없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날밤이가 고양이가 불쌍하고 아빠가 걱정스러워 다가오는 건 당연했다. 내 피곤을 합리화하려고 다른 인격의 허물을 키웠을 뿐이다. 얼마든지 날밤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경찰이 올 때까지 고양이 곁을 지킬 수 있었다. 하다못해 차량 담요라도 덮어줄 수 있었다. 일상적 표준인 신고 말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책임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클레어 키건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게 최악’이라 했다.(『이처럼 사소한 것들』) 우치다 다쓰루는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하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우선하겠다는 사람이 어른’이라 했다.(『곤란한 성숙』) 둘 다 자기 괴로움에 묶였지만 날밤이가 나보다 어른이었다. 아빠는 어른을 보여주지 못했다. 날밤이는 그래서, 무책임했던 내 눈빛과 고성 탓에 남의 슬픔에 민감한 성격으로 자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속의 괴로움들은 각자 연기대상 후보자여서 모두 백화점 입점 브랜드처럼 보였다. 나와 맞선 상대의 괴로움에 내 그것을 비춰볼 때 내 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됐다. 그게 함께 나눌 가치가 있는지 비춰본 후에야 진짜 가격이 드러났다. 괴로움을 나누면 작아진다는 말은 그런 뜻이기도 했나 보다. 타인이라는 거울이 있어야 내가 보이는 거였구나. 그게 자기감정을 분별해 머물러야 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이성, 그러니까 내면의 감옥을 나서는 열쇠였구나. 날밤아, 아빠가 정말 잘못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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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에서 살아남기 #책임(어른)

인용 대사 출처 : 허먼 멜빌, 『모비 딕』(Moby Dick : or, The Whale), 1851, 미국. Chapter 36과 134. 발췌 번역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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