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돋보기

짧은 이야기 2

by 이아진


2008년 12월, 아빠를 하늘 나라로 보내고 나는 반년 이상 몸도 정신도 많이 아팠다. 숙면이란 것이 무언지 모른 채 이미 20년 이상을 살아 왔지만 그 보다 더한 얕은 잠을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우는 날이 많았다. 그저 혼잣말로 아빠하고 부르면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 마냥 자동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빠란 나에게 그저 거기 우뚝 서 있는 굉장히 큰 나무나 산 같은, 내가 무척 의지하고 신뢰하며 .존경하고 또 무척 사랑하는 독보적인 그런 존재였다. 나는 아빠를 너무 사랑했다.


아빠는 폐암으로 투병을 했다. 차갑고 이성적이며 의지가 강하고 정확한 성격의 아빠는 암 수술을 마치고 병원에 누워 있었다. 나는 중국 칭다오란 도시에 살고 있었고 시어머니를 불러 아이들을 맡기고 혼자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아빠의 병실을 2주간 지켰다. 옆구리부터 등쪽으로 수술 자국이 나 있는 아빠에게 큰 애가 태어 났을 때 아빠가 사 준 디지털 카메라로 수술 자국을 찍어 보여 주었다. 아빠를 빼 닮은 나는 성별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역시 차갑고 이성적이고 무뚝뚝 했다. 그런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수술 자국을 확인하는 것 같은 다른 곳에선 일어나지 않을 일반적이지 않은 일은 나에게 또 아빠에게 있어 희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다른 흔한 엄마들처럼 아이가 아플 때 대신 아파 주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인생은 혼자 가는 거라는 독고다이인 주제에 아빠를 지키며 나는 간절히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아빠대신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나는 바라고 또 바랐다. 거기엔 아빠가 세상에 남아 기여 할 수 있는 일들이 내가 세상에서 해 낼 수 있는 일보다 더 원대하다는 합리적인 생각도 보태어져 있었다.


수술 후 3년을 못 넘기고 아빠는 돌아 가셨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나는 나의 무지를 원망했는데 폐 기능이 나쁜 아빠가 감기가 걸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무심결에 방치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살아 생전 연구소라도 하나 지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쌀쌀한 날씨에도 연구소 부지를 보러 다니셨다. 그렇다. 우리 아빠는 귀 떨어진 동전 한 푼 없는 상태로 시작해 코스닥에 상장된 회사를 일구어 낸, 그 분야에선 신화로 불리우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쓰고 있는 아빠를 보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했다. 심폐 소생술을 했으나 아빠는 살아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철 침대-가장 자리를 접으면 관 모양이 되는-로 옮겨져 영안실로 갔다. 아빠 발치에 서 있다 그 철 침대로 옮겨지는 아빠 얼굴이 내 쪽으로 왔을 때 나는 보았다. 너무 무뚝뚝해서 정말 웃길 때라야 입 꼬리 양쪽이 살짝 올라 갔다 순식간에 원 위치 되던 아빠의 그 미소를 말이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아빠는 하늘 나라로 떠났다. 아픔도 고통도 없는 천국으로 간다고 아빠는 나에게 웃어 준 걸까. 가족들이 아빠 주변에 함께 있었으나 아빠의 그 미소는 내게만 보여졌고 이후 오래도록 힘든 나를 지탱하는 선물이 되었다. 내가 듣기 싫다고 했는데도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고 자꾸 말하던 아빠의 말 대로 그 날은 12월의 8번째 되는 날이었다. 숨이 넘어갈만큼 울고 불며 아빠 장례를 치르고 돌아간 집에는 늘 눕던 아빠의 자리 머리맡에 주인 잃은 약봉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집안에서 가장 작은 방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 정리하는 걸 즐기는 엄마는 아빠가 떠나고 몇년이 지난 후부터 뜨문 뜨문 아빠의 유품을 내어 놓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아빠가 차던 시계를, 어떤 날은 IMF때 아빠가 사원들을 독려하기 위해 장문의 편지 글을 새긴 회사 기념 타올을 또 어떤 날은 돋수가 다른 돋보기 들을 말이다. 이제 노안이 오는 나이가 된 나는 그 중 하나를 쓰고 책을 읽거나 영양제 뒷면에 있는 작은 글씨를 보거나 한다. 돌아 가시기 얼마 전까지 늘 출근 길 허리춤에 차고 나가던 돋수 높은 접이식 돋보기는 서랍 안 쪽에 넣어 놓았다. 아빠는 여전히 그리웠고 아빠라고 되뇌이면 자동으로 눈물이 쏟아지는 건 여전하지만 이제는 아빠가 없는 걸 조금 받아 들인 듯 살았다. 아빠도 없는데 때 되면 먹고 때 되면 자고 아무일 없다는 듯 살아 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씩 옅어져 갔다. 그렇게 아빠가 걸었을 세월들을 나도 밟으며 아빠의 돋보기를 쓰게 된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어린애처럼 가끔 허공을 향해 아빠~라고 작게 불러보곤 한다. 아빠를 한번만, 딱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정말이지 좋겠다는 슬픈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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