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참외

짧은 이야기 3

by 이아진

20년을 외국을 돌며 살았다. 터울이 제법 지는 둘째까지 대학을 졸업한 작년부터 나의 후반생에 대한 생각을 했더랬다. 생각도 하고 방황도 하고 고뇌도 하고 낯선 나라들로 긴 여행도 했다. 안간힘을 썼지만 해답을 찾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처음 한국을 떠났을 때는 취미 삼아 베이킹을 하다가 근방에 소문이 나는 바람에 소일삼아 베이킹 클라스를 했다. 뭐든 깊이 파고 드는 성격 탓인지 아주 유명하진 못해도 제법 한인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렸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걸 포기하고 지구 반대편의 더 먼 나라로 떠났을 때는 취미 삼아 요리를 시작했다. 특이한 이력이 신문사의 눈에 띄어 기사화 되며 한국에선 유명하나 외국에선 그 유명한 이름뿐인 신문사의 신문에 내 이름이 걸린 푸드 컬럼을 오래 기고하게 되었다. 동영상 클라스를 판매하는 회사들의 요청을 받아 간간이 요리 동영상도 제작했다. 그 시간이 꽤 길어져 나도 내가 요리인이라 여겨질 때쯤 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의 리듬체조 학원을 인수했다. 전담으로 운영하는 강사들이 고용되어 있던 상태의 학원이라 내 20년의 공백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큰 갈등없이 그렇게 했다. 한창 때에는 나도 심판 생활을 하고 지도자 생활을 하며 좋은 선수들을 줄줄이 뽑아 내곤 했었다. 큰 국제 대회의 경기 진행을 맡기도 하고 주부심을 관리하기도 했었고 바쁜 틈을 쪼개 대학에 강의도 여러곳 나갔었지만 이제 그것들이 과거의 영광이 된지 오래인 나는 그렇게 한국으로 반쯤 발을 걸치기 시작했다. 두달을 한국에서 지내고 두 달은 내 집에서 지내는 생활을 시작했는데 15시간이나 되는 비행 시간이 여간 고달픈게 아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의욕을 가지고 시작한 이 일이 나를 힘 내게 했고 학원에 전념하며 나는 사는 것 같은 좋은 에너지를 받았다.


이번에도 막 도착한 서울에서 다음날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생활을 하다 주말을 맞았고 아직 시차도 못 맞춘터라 첫 주말을 좀 쉬어 보자며 외출을 미뤘다. 곧 있을 국제 대회에 선 보일 굿즈 제작에 열을 올리며 컴퓨터를 붙들고 작업을 하다 영동대교 건너 노룬산 시장에 떡볶이를 사러 갔다. 재래 시장 초입 야채 가게에서 내 작은 주먹보다도 훨씬 작은 참외를 열 두어개 넣어 놓은 참외 한 봉지를 사 들고 돌아와 엄마에게 내 밀었다. 몇년 전 제주도의 길가에서 껍찔채 먹는 참외라나 하며 한 봉지씩 가득 담아 놓은 걸 사다 드렸더니 좋아하던 게 생각 나서였는데 역시 어디서 샀느냐, 이게 만원이더냐, 열개가 넘게 들었네, 우리 동네는 이런게 없는데.. 하는 엄마의 독백이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영동 대교와 한강이 고스란히 내려다 보이는 청담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이 동네는 비싸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는 곳이었으며 편의점이 가장 정직하고 저렴한 곳이기까지 했다. 떡볶이를 반쯤 먹고 거실에 나가니 엄마는 그 때까지도 참외 봉투를 이리 저리 돌려 보고 있었고 무슨 참외를 가지고 그리 오래 연구를 하냐는 내 말에 올 여름 처음 참외네 하는 말을 돌려 주었다.


오십도 중반을 넘어가며 나는 노인들을 보면 참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늙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파릇하던 대학 시절이 아직도 엊그제 같고 아이들이 아기적이던 그 때도 어제 같은데 나는 언제 이렇게 달려와 흰 머리를 잔뜩 얹은 채 여기 서 있나 하는 생각도 한다. 무뚝뚝함이 아빠를 꼭 닮았고 일이란 것만 보면 미쳐 돌아치며 주변은 안중에도 없는 나에게 독백처럼 참외에 대해 한참을 얘기하는 엄마는 큰 딸이 어려웠을 것이다. 29살 먹은 내 아들이 가끔 나도 어려우니 말이다. 그렇게 대를 이어 내려온 무뚝뚝함이 잘 고쳐지지 않아 엄마를 독백하게 하고 보는 나를 안스럽게 한다.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며 아기들은 또 어른이 되는, 세월이 무거운데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어쩔 수 없는 인생의 구비 구비가 가끔은 눈물나게 서글펐다. 눈이 부시게 곱던 얼굴이 노인이 되고 자그마한 키가 더 작아진 엄마 앞으로 얼른 그 참외 하나를 깍아 밀어 놓는다. 한강위로 날아 오른 검은 새 떼가 통 유리로 된 커다란 베란다 창문 앞으로 무리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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