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야기는 현재(지구에서)와 과거(달)가 번갈아 가며 진행됩니다.
[달]
규정상 기지 내부에서 1m 이상 바닥을 차고 뛰어오르는 건 제한된 행위였지만, 금지된 건 아니었다. 때문에, 월면에 만들어진 이동용 튜브를 포함, 주요 장소들의 천장고는 몇몇 철없는 작업자나 요원들이 장난을 치지 못하게 3m를 넘기지 않았다.(꽤나 적절한 조치였다.) 발판에 올라서자, ‘9A’라고 적힌 문이 민트색 빛을 밝히며 움직였다. 반듯한 검은색 바닥엔 이동 방향을 뜻하는 형광색 표식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빛나고 있었다. 밝고 예리한 화살표였다.
하나는 길을 거닐며 양옆의 유리 벽 너머를 살폈다. 짙은 밤의 열대우림 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식물 군락과 정원은 달 기지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뿌연 유리 위쪽에서 커질 대로 커진 물방울들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지구에서 멀리 떠나온 각종 곤충들은 허공에서 쉽사리 방황하거나(갑자기 엉뚱한 쪽으로 휙 날아가기 일쑤였다.), 그저 유리 표면에 찰싹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몇 달째 유리에 기대어 자라나던 널찍한 알로카시아 잎 위에 사마귀가 앞발을 외투처럼 여미고 있었다. 하나는 행복에 겨운 아이처럼 유리로 다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깜짝 놀란 달의 사마귀는 자세를 낮추어 좌우로 몸을 흔들거렸다. 9A로 이어진 황홀한 길목엔 언제나 지구와 달이 공존했다.
울창한 숲 반대편엔 다양한 크기와 종류에 따라 나뉜 월면차들이 붉은 칠이 되어 있는 네모난 구역에 주차되어 있었다. 바퀴들은 전부 바닥의 잠금장치에 묶여 있었고, 그 주위로는 허리에 작업복을 두른 정비기사들과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알록달록한 반팔차림의 엔지니어들이 격납고 안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대의 무거운 소명을 짊어진 채 격식을 차리지 않았고,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분주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실외활동을 위해서 매번 거쳐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에도 불구하고, 휴일이나 틈이 날 때마다 달 산책을 빼먹지 않으려 했다.
하나는 같은 곳에서 일하는 동료, 예나의 금쪽같은 휴일을 최대한 덜 빼앗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선외활동용 우주복 환복실이 9A 주방에서 고작 열 걸음 떨어져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주방의 한쪽 벽에서 바닥까지 한 덩어리로 이어진 회색 테이블 위에서 예나가 은색의 비닐 주머니를 뜯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비닐 주머니를 들어 올리자, 옆에 있던 숟가락이 고전 액션 영화 속 절벽에서 떨어지는 악당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벽을 타고 바닥까지 굴러 내려갔다. 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미끄럼 방지 처리가 된 회색 주방 계단을 밟고 올라가 말했다.
“내 생각에 벽에 달라붙은 그 회색 테이블... 아무리 봐도 콘크리트가 다 굳어버리기 전에 한바탕 토해버린 것처럼 생겼어.”
“디자이너가 찐득찐득한 밀크셰이크에서 영감을 받아서 그런 걸 수도 있어. 덕분에 어디에 부딪혀서 멍이 날 일은 없으니까…”
예나가 입꼬리에 힘을 주고는 아침 식사가 든 주머니를 마지막으로 힘껏 잡아 뜯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가지런히 묶인 장미 모양 번에서 삐져나온 흑갈색 머리카락 몇 올이 약하게 흔들렸다.
“도와줘...”
하나는 그녀가 건넨 음식 주머니를 이빨로 깨문 채 목 힘줄이 불쑥 튀어나올 때까지 잡아당겼다. 주머니의 뜯어진 입구로 둥글게 뭉친 수증기가 피었다.
“매번 신기하다니까.”
“아니야, 어쩌면 우리가 제대로 뜯는 법을 몰라서 이러는 걸 수도 있어. 지난번에 지구에서 온 곰돌이 젤리처럼.”
하나가 이빨에 낀 은 비닐 조각을 손바닥에 뱉어냈다.
“도대체, 우리 가위는 누가 가져간 걸까?”
하나는 꿀벌 모양 머그컵을 손에 쥐고서 벽에 부착된 나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에너지 수프’라고 쓰인 얇은 디스펜서가 바닥의 레일을 따라 굴러 나왔다.
그녀는 김이 모락 나는 컵을 가지고 화분 위에 설치된 모니터로 걸어갔다. 개인업무용 페이지엔 그녀가 달 표면 위를 여행하기 위해 본부로부터 사전에 허가받은 문서와 지정 경로가 올려져 있었다.
예나는 잔뜩 오므린 입술로 숟가락 끝을 문 채, 한 손으로 널찍한 도자기 그릇을 들고, 다른 손으로 뉴스를 고르고 있었다. 얇게 썰린 계란과 삶은 파가 곁들여진 불고기 덮밥은 수십 개의 메뉴들 중 그녀가 최소 일주일에 두세 번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소식을 발견한 듯 입에서 숟가락을 빼고 말했다.
“하나야, 이것 봐. 유전자 변형 배나무 실험이 성공했데. 독특한 능력을 가진 나무에 대한 얘기야. 아니, '기능'이라 해야 할까?”
“어떤 실험?”
“땅에서 중금속이나, 독극물 같은 것들만 축적해서 따로 열매를 따로 맺히게 하는 실험. 이론 대로면, 성체 나무는 아주 미세한 독까지 빨아들여서 수확철에 단 한 개의 파란색 배를 맺게 되는...”
예나는 턱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뉴스 소식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열매 하나를 희생하는 값으로 나머지 전체 열매들을 독소에서 구해내도록 하는 것이지. 엄청 신기해. ‘다만, 어린 나무일 땐 독성 반응에 훨씬 민감하다. 몇 시간 만에 푸릇한 잎이라도 다 떨어트리는 나무는 마치 탄광 안의 카나리아와 비슷하다.’라고 쓰여있어.”
하나는 나무가 다 자라는데 몇 년이 걸리는지 궁금했다.
“만약 원래 땅이 깨끗해서 포집할 독이 별로 없다면 어떻게 해? 그래서 충분히 파랗지 않다면?”
예나가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머리에 위태롭게 매여진 번이 스르륵 풀렸다. 그녀는 숟가락을 입에 문채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글쎄? 그럼 러시안룰렛이 되겠지.”
“아 참, 카메라 챙겼어?”
하나는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동그란 눈으로 고갤 끄덕였다. 신이 나 계단 4개를 겅중 뛰어내렸다. “응, 오늘 네가 감압실 보조만 도와주면 돼. 통신이나 허가 같은 건 내가 알아서 할게.”
“조심해. 그리고... 동아시아 쪽 날씨 지도는?” 예나가 뉴스 화면을 훑으며 물었다.
“당연히 확인했지. 그건 그렇고, 너는 그 남자랑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그 ‘고요의 바다’에서 엔지니어로 일한다는 사람말이야.”
예나는 순간 화면 위를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웃음을 애써 감추기 힘들어 위아래 입술을 모두 깨물었다.
“훌찬? 뭐... 우주복 입고 건설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지 않을까?”
“내 기억이 맞다면 그가 바깥에 흙을 이용해서 어떤 중요한 일을 했는데... 흙을 단단히 굳혀서 건설 자재로 쓰는 일이라 했나?”
“맞아. 그가 앞으로 몇 년간 지상 건설일 때문에 바빠질 거라는데, 부자들은 별장도 참 희한한데 짓는다니까.”
예나가 고갤 끄덕이고는 어깰 으쓱였다. 업무 지원을 위해 SubLuna-2218에서 몇 주간 머무는 동안 그녀가 친분을 맺은 뭄바이 출신의 건축 엔지니어였다.
“아주 조금씩만 연락을 주고받는 중이야. 별 다른 건 없어.”
하나는 예나가 업무 중에도 달 저편의 누군가와 한시도 교감을 멈추지 않는 걸 알고도, 모르는 체했다. 오히려 달에서 시작하는 그들의 특별한 인연을 축복하고 싶었고, 동시에 부러웠다.
예나는 발걸음이 가벼워 나는 기분을 아는 듯했다.
두 갈래로 나뉜 길목에서 그들은 서로를 껴안았다. 서브루나 의료 센터 간호 병동의 자매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는 자기 이름이 영어로 표시된 벽 앞에 다가가 냉장고 문처럼 생긴 해치 커버를 잡아당겼다. 해치는 평평한 선반의 형태였고,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 위에 눈에 익은 우주복 착용순서와 안전 프로토콜 정보가 나타났다. 두 개의 현란한 모션 홀로그램은 언제나 동시에 재생되었다. 안내 음성조차 없었다.
달의 기지에서 가슴 아픈 사고가 일어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벨트나 클램프, 혹은 연로탱크에 차마 발견되지 못한 문제가 있을 땐 로필라가 절대로 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흰색 일체형 슈트를 한쪽 팔에 걸쳐 메고는 장비가 한가득 든 바구니를 확인했다. 여분의 비상용 산소팩, 바이저가 열린 헬멧, 정전기 방지 재질의 장갑과 부츠 등. 그녀는 등판이 가오리처럼 생긴 우둘투둘한 통신기기 조끼를 입은 뒤, 턱 밑까지 지퍼를 올려 잠갔다. 바구니는 가벼웠고, 슈트차림의 발걸음은 전보다 조금 더 무거웠다.
챔버의 한쪽 벽면은 전부 투명한 창문이었다. 하나는 감압실에 들어와 헬멧을 착용한 뒤, 가로로 길쭉한 팔각형 창문 너머에서 손을 흔드는 예나를 보았다.
“아, 아. 하나야, 내 목소리가 잘 들린다면, 귀여운 토끼처럼 ‘깡충! 깡충!’ 뛰어봐.”
하나는 곧바로 팔을 흔들며 부츠로 땅을 세게 찼다. 비눗방울처럼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자, 창문 너머에서 예나가 입을 벌린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는 입술을 오므린 채 장갑으로 두꺼운 헬멧 유리를 살짝 건드렸다. 마치 달의 여신처럼, 우아한 미소로 친구에게 행운의 키스를 날려 보냈다.
[지구에서]
하나는 나무가 다 컸을 때의 모습을 생각했다. 구불거리는 여러 검은색 가지 위에 아주 흐릿하게 묘사할 수 있는 건 꽃과 비슷했다. 손 한 뼘 길이마다 하얀 폭죽처럼 세밀한 모양으로 터져있는 배꽃은 한 곳에 모여있을 때 더욱 아름다웠다.
나무는 이미 튼튼한 듯 겉에 매끈한 광택 맴돌고 있었다. 낮에도 해가 꽤 오래도록 비추는 자리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녀는 난쟁이 정원 장식 옆에 있던 컵을 집어 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혼자 휠체어를 끌고 나왔던 프란츠의 것이었다. 그는 배나무뿌리 부분에 요거트를 담았던 컵으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스스로 밖에 나와 배나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데 불구하고, 하나가 나무를 돌보는 걸 거들고 싶어 했다.
“그곳에 이 나무를 가져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가 말을 하는 동안 턱과 목이 침으로 젖어있었다. 하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침을 닦아냈다.
“이건 계속 존재해야 해요.”
프란츠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숨 쉬는, 외로운 나무에서 모든 자잘한 꿈들을 거둬들일 시간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지팡이가 바닥을 톡톡 건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재활원의 창틀에서 누군가의 오른손이 족제비의 꼬리처럼 잽싸게 숨어들었다.
하나는 창문을 계속 주시했다. 활짝 열려 있는, 익숙한 병실 창가였다.
낮의 숲은 여전히 뿌연 안개로 덮여있었다. 두껍고 은밀한 숲의 고집에 불구하고, 햇빛은 디딜 수 있는 자리와, 그렇지 않은 곳에 환한 실마리를 여럿 남기고 있었다. 하나는 마지막으로 종아리 높이까지 자란 보라색 들꽃잎과 녹색 이끼가 내려앉은 통나무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눈에 익히려 했다. 그리고 틈틈이 빅토리아가 잘 따라오는지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았다.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나아져 있었다. 하나가 부축하려 다가올 때면 매번 고갤 저으며 마다했다. 지팡이를 쥔 손아귀, 이끼와 흙에 도장 찍는 단단한 발걸음, 얕고 빠른 숨결.
그녀는 늘 시험에 접어든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오늘이나 내일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하나는 그녀가 소식 때문에 고집을 피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 아침, 타오는 복도를 거닐면서 누구든 마음을 조이게 만드는 소식을 전했다. 잠에서 깨길 거부하는 여자아이를 품에 안은 채, 이제 주변 도시 대부분은 비었으며, 다른 자발적 일꾼들이 내일 오후 그들을 데려가기 위해 재활원으로 수송기 세 대를 몰고 올 이야기를 전달했다.
“진짜라고 믿기지 않아요. 내일이면 재활원에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도 다 사라질 테고, 낮에도 밤처럼 정적만 가득할 거예요.”
하나가 손목의 물기를 털었다.
빅토리아는 작은 개울 옆 나무에 한 손을 짚고 있었다. 땀과 희미한 빛이 그녀의 이마에 머물렀다.
“그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지.”
“저에겐 아직 큰일이 남아있어요. 그 아이에게 오늘, 늦으면 내일 아침 까지라도 동의를 구해야 해요.”
“아직 아이가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네.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라도 좋을 텐데. 과연 제가 그를 설득해서 그곳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스타만 여기에 혼자 두고 떠나는 건 상상하기도 싫어요.”
빅토리아는 하나를 정확히 바라보고는 다가가 손을 감쌌다.
“우리는 결코 그 아이를 놓쳐서는 안 돼.”
손아귀는 지팡이처럼 차가웠지만 하나는 단단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스타만 결정을 내리면 우리 재활원 조사는 끝날 거예요.” 하나가 한숨을 뱉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우리를 따라가기 싫어서 이때까지 아무와 대화를 하지 않았던 거라면 어떻게 하죠? 스타가 그동안 우릴 피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이유가 실은 여기... 벌판에 남기 위한 거였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빅토리아는 긴장한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 다정한 어른처럼 부드럽게 흔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쩌면, 스타가 아주 독립적으로 자라났기 때문일 거야. 그곳엔 정제된 물도, 규칙적이고 맛 좋은 식사도, 인간성도 없어. 내가 말해준 것들로 너도 예측할 수 있을 거야. 짐승이 인간처럼 문명화하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협동이나 지능 때문이 아니란 걸 말이지.”
“그가 현실에 남으려는 걸 존중한다면, 나중에 그게 제 안에서 매서운 가시 뭉치가 되어 발견될 것만 같아요. 그때쯤이면 이미 우리가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있을 시기니까요. 어젯밤에도, 이 생각을 멈추기 힘들었어요.”
“혼자서 알아내기 힘들 거란 거 알아, 하나.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나도 스타를 그곳에 함께 데려가고 싶구나.”
빅토리아는 특별한 장식 없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고, 그걸 태연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나무 표면엔 지울 수 없는 표식들로 가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로지 더욱 선명해져 갈 선들의 연속이었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 애의 마음을 펼쳐서 신문처럼 읽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거예요. 바보 같죠?”
“아니, 그렇지 않아. 절대로.”
이번엔 빅토리아가 그녀의 도움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스러지는 다양한 소리를 들으며 한 걸음씩 디뎠다. 길가에 수두룩하게 쌓인 낙엽은 불에 타다 만 모습처럼 희었다. 땅은 제법 평평했고, 낙엽더미 사이로 거의 다 지워져 가는 흰색 선이 내리막길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주위엔 곧고 높게 자란 나무들이 빼곡했다. 허락된 땅 안에서 그 나무들은 서로 다투고, 또 격려하며 자라난 듯 보였다. 하나는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나타나는 황금색 빛줄기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이 부셔도 감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무들이 한 발씩 움직이며 햇빛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짤막한 새소리에 하나는 고갤 높이 들어 올렸다. 새들의 검은 실루엣이 바늘 같은 우듬지 위로 자유로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빅토리아의 어깨를 꼭 잡았다. 곧고 푸른 나무들의 군집을 신화 속에서 저주받은 영웅들의 모습처럼 보였다. 위기가 약속된 땅에서 영웅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물을 지켜내려는 모습이었다.
얼음을 품은 흙과 나무껍질의 향기가 숲 속의 보물처럼 널리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은 너무나 고요했다. 하나는 그 기대가 미련한 걸 알면서도, 놓아주기 싫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낯설고 이상한 것들을 인식하는 건 피곤하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눈 주위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자연이 사람에게 보이는 텍스트엔 누구도 값을 매길 수가 없었다.
“너무나 좋았다, 모든 것들이.”
“저도요. 이건 저희의 마지막 산책이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니?”
“네?”
빅토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밤 산책은 또 어떨까? 저녁 먹고, 스타를 데리고 잠시 다녀오는 거야. 환한 달 아래에서.”
그녀는 하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이제 내 자리로 돌아가 낮잠을 자야겠다. 그들에겐 어제 작별을 고했으니까.”
“세 사람 모두 웃고 있었어요. 손까지 흔들면서, 밖으로 나오기 전에 제가 똑똑히 봤어요.”
갈색의 긴 머리 여인이 검은 소매를 차분히 걷어 올렸다.
“괜찮아요? L-2 선택자들이 눈을 감는 과정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죠?”
하나는 실내 화단의 말라죽은 갈색 식물들만 바라보며 고갤 끄덕였다. 소파 등받이 위로 놓인 이파리는 마술 공연의 녹아버린 숟가락 같았다. 이만 오후의 아지랑이에 마구 흔들리는 그림자에서 눈을 떼고 싶었다.
채광 좋은 별관 실내에 모인 사람들은 검은색이 들어간 바지, 외투, 혹은 스카프 같은 의류를 걸치고 있었다. 서로를 껴안은 사람들은 꼭 춤을 추는 것처럼 얌전히 흔들거렸다. 재활원에 들어와 머릴 기른 지 3년이 넘은 은발의 노신사가 혼자서 바닥에 진 형형색색의 체크무늬 그림자 위를 서성였고, 아치 기둥에 기대어 있는 두 젊은 여성은 똑같이 목에 한 손을 얹은 자세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 아내를 떠나보낸 조슈아는 햇볕을 피해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늘 때문인지, 혹은 아내의 부재 때문인지, 그의 검은 옷은 원래 색보다 더 검어 보였다.
“이상하게도 울고 싶지가 않아요.” 하나가 말했다. “모든 분들은 평온한 표정이었어요. 그리고 근래에 들어 가장 밝은 미소처럼 보였고요.”
갈색 머리의 여인은 천천히 내려보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울지 않아도 돼요.”
하나가 그녀의 가슴께에 머릴 기댔다. “하지만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겠죠? 우린 때때로 보고 싶은 방식대로 뭔가를 보려 하니까...”
“이기적인 사람이 지금 이곳에서 다친 아이들과 사람들을 돌보는데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것 같아요? 단 하루라도?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명심해요, 하나.” 그녀는 하나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당신은 우리의 달이에요. 세상이 두렵고 불안해도 우리 곁에 있으니까.”
강당의 불이 완전히 꺼졌고, 계단을 오르는 퍽퍽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아미르가 투명한 햇빛 아래로 나타났다. 대낮의 열기와 함께 유리병에 갇힌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듣기로는, 폭도들이 변절자를 처형할 때마다 이런 유리에 집어넣은 뒤에 만두처럼 열로 쪄죽인다 하던데.”
아미르가 이마에 손을 대고 그늘을 만들었다. 속에서 풍뎅이 같은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하나가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게 이상한 듯 잠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돌아 빨간색 벨벳 퀼팅 문의 손잡이를 당겼다. 두 덩이의 커다란 문짝은 지하에서 폭탄이 터지거나, 교향곡을 연주해도 휘파람 소리조차 새어나지 않을 것처럼 두꺼웠다.
문이 닫히는 짧은 순간 하나는 지하에서 L-2 알약이 사람과 세상 사이에 확고한 경계를 나누던 순간을 떠올렸다. 텅 빈 객석엔 화려한 섬광이 켜져 있었고, 기름칠된 나무 팔레트 무대에서 사람들은 따듯한 악수와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우주가 수축을 하지 않는 한 재회할 수 없는 우주비행사들에게 행운을 비는 시간과 같았다. 따듯한 공기가 그녀의 볼 위를 타고 올라 귀를 감쌌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거대한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고,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한 마침표였다.
“아침에 요거트 정말 맛있었어.”
아미르가 장갑을 벗으며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설교자가 건포도나 아몬드를 도대체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요거트에 뿌려서 먹더라. 내가 그를 부러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랬어?”
하나는 빨간 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다용도실에 L-2 한 묶음을 가지러 들어갔을 때 바닥에서 반쪽짜리 호두가 떨어진 걸 봤어. 가끔 설교자가 모습을 감출 때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대충 그려지지 않아?” 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그는 먹을게 충분해도 직접 사냥을 하고 싶은가 봐. 완전 야생이지.”
“그러게.”
아미르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수고했어. 하나.”
“너도.”
“이제 아침마다 이 유니폼을 입을 일이 없다는 게 이상한 것 같아. 비록 설교자의 시커먼 발자국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건 좋긴 하지만.”
“나도 그 사실이 참 낯설긴 하지만 너도 남은 시간 동안 여행을 해야 하니까. 나름대로 할 일들을 준비해야 하잖아. 그리고, 내일 우리와 함께 수송기를 타고 갈 거야?”
“응, 공항까지.” 아미르가 두 손을 허리춤에 대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너는 준비할 게 정말 많겠다. 몇 달간의 계획이 있으니까. 우린 그저 몸만 있으면 되는데.”
“생각보다 마냥 즐겁지는 않아. 너도 알다시피, 이건 그냥 피할 수 없는 관문을 잠자코 맞이하길 거부하는 바보들이 잠시나마 도망치려는 거니까.”
“너답지 않게 왜 그런 말을 해? 기대되지 않아?” 하나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허전함을 견디기 힘든 친구들끼리 뭉치는 것뿐이야. 여행이란 이름으로, 최대한 남은 시간을 축복하려는 일종의 몸부림이지. 생각해 봐, 얼마나 이상하겠어. 어차피 우린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할 테고, 경험도 진짜 경험이라 보기 힘들 거야. 끝에서 내 손에 남는 건 없을 테니까.”
아미르는 약간 적적한 표정이었다. 그 특유의 낙천성 일부가 그늘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드문 일이었다. 얼굴이나 말투로 불완전한 신호를 나타낸 것 또한 처음이었다.
하나는 마치 자기 발뒤꿈치 뒤까지 눈덩이가 굴러온 기분이었다.
“아미르, 내 말 들어봐. 네가 이 여행을 작년부터 고대해 온 거 잘 알아. 그러니까,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멋진 장소에서 아름다운 노래도 실컷 불러야 해.”
그녀는 강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능한 한 기억에 남을만한 모험을 하는데 주저하지 마.”
그녀의 갑작스러운 충고에 아미르는 덩달아 활기가 도는 듯 유쾌한 웃음을 보였다. 그의 시선은 환한 바닥에 머물렀다.
검은색 얇은 스카프를 어깨에 두른 노부인이 질색을 한 얼굴로 뭔갈 읊조리며 종종걸음으로 아미르에게 다가왔다.
“세상에나.”
밝은 햇볕 아래서 그녀의 스카프를 적신 얼룩과 눈물 자국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어른들도 아미르에게 다가가, 팔을 두르며 서로를 껴안았다. 그들이 모두 눈을 감자,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 아미르는 자신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인 사람들을 한 명씩 둘러보았다. 그리고 하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았어, 노력해 볼게.’
그는 소리 없이 입모양만 움직였다.
하나는 서둘러 별관을 나와 하얀 아치형 통로를 지났다. 두 통의 메시지가 그녀에게 도착해 있었다. 호출인 이름은 ‘Moon pal(달 친구)’.
바깥엔 바람도 불지 않았고, 공기도 눅눅하지 않았다. 때문에 초목의 냄새가 더욱 짙었다. 그녀는 말랑한 신발로 애써 단단한 회색 바닥 위를 뛰기 시작했다. 배나무 앞을 지나던 그녀는 바닥의 하얀 점 하나를 발견하곤, 아침에 그곳에서 본 프란츠를 잠시 떠올렸다.
그녀는 타오가 있는 행정실로 이어진 계단을 한 번에 여러 개씩 뛰어올랐다. 기쁨의 소리가 벌써부터 귓가를 맴도는 것처럼 느꼈다. 보통 부모님은 먼저 연락을 걸지 않았기에, 그녀는 수많은 ‘달 친구들’ 중 그게 누구의 연락인지 알 것 같았다.
하나는 벽에 달린 공 모양의 영사기 앞에서 가쁜 숨을 고르며 신원을 인증했다. 순식간에 재활원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정보들이 나타났고, 책 종이 넘어가듯 한 명씩 사라졌다.
“로필라, 여성 1명, 인증 완료.”
간결한 선 형태의 은은한 살구색 조명들이 벽과 천장을 밝히고 있었다. 불규칙적으로 설치된 빛들은 밀폐된 실내를 거니는 사람이 넘어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밝았다.
의자 하나가 제자리에서 뱅그르 돌았다. 타오가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왜 뛰어왔어? 어차피 지금은 공군부대와 교신하는 시간이라, 네 친구와 연결을 할 수 없을 거야.” 정숙하게 속으로 쥐여 짜는 목소리였다.
“교신이 끝나면 알려줄게, 하나. 그동안 아무 데나 잠깐 앉아 있어...”
하나는 놀란 눈으로 책상과 그 아래 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젖고, 구겨진 휴지들이 한가득이었다. 타오는 신경이 쓰인 듯 의자를 돌려 바로 앞에 있던 홀로그램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음소거 처리가 된 타오의 홀로그램 스크린 속엔 검은 옷차림의 수많은 사람들이 턱이나 팔꿈치를 만지작거렸고, 그 모습은 마치 입만 뻐끔 거리는 물고기들 같았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원형 탁자의 가운데에 떠있는 지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타오.”
하나는 의자로 다가가 조심스레 타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잘 정돈된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됐어? 다들 문제없이 잘 갔어?” 타오가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고는 따듯한 금속 섬유의 손으로 하나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모두 자신이 원하던 선택을 했어. 아주 빠르거나, 느리지도 않았고.”
타오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코를 들이마셨다.
“그거 알아? 오늘 아침에 웃기는 일이 벌어졌어.”
그녀는 실없는 기침 하듯 웃으며 손을 올렸다. 그리곤 천장 바로 아래에 떠 있던 주황색 홀로그램 스크린 하나를 잡아 끄는 손동작을 보였다. 책상으로 내려온 스크린엔 사진 하나와 조그마한 본문 외에 군데군데 빈 부분이 많았다. 하나는 찌푸린 눈으로 투명한 스크린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 부분을 읽어봐, 여기부터.” 타오는 코를 문질렀고, 다른 손으로 본문의 첫 번째 줄을 가리켰다.
“오늘 오전 8시 41분, 한반도의 UG 임시 영사관에 폭발물을 지닌 채 잠입을… 시도하려던 무리가 체포되어...”
하나는 곧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폭도들에 대한 사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영사관은 동해에서 고작 몇 킬로미터 거리에 떨어져 있잖아. 이게 믿겨?” 타오가 탄식했다.
“사망자는 없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몇몇 흰 꼬리들이 도시가 비워질 걸 눈치채고 탈출하려 한 게 분명해.” 하나는 입술에 손을 댄 채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생존자들은 물론 흰 꼬리들도 베루마스 프로젝트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을 거야.”
“맞아, 내 말이.” 타오가 네 개의 금속 손가락들로 반복해 책상을 두드렸다. “드론들이 쥐구멍을 막기 위해 그토록 먼지를 날리며 폐쇄 도시를 바쁘게 날아다녔을 텐데, 이걸 봐. 중요한 단계를 앞두고 무슨 일이 벌어졌나. 흰 꼬리와 무고한 사람들을 한 구석에 가둬놓고, 아무도 못 나오게 하는 게 과연 누굴 위한 방어야?”
타오가 높게 갈라진 목소리로 따지고는, 오목한 의자에 푹 드러누웠다.
“나 말고도,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걸 누군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거야. 내가 안젤로 구조대에 있을 때부터 이미 완벽한 통제라는 건 불가능한 게 익히 알려진 현실이었어. 이건 꿰매야 할 상처에 임시방편으로 누더기만 댄 격이라고.”
하나는 대놓고 이견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얇은 주황색 유리 같은 홀로그램 스크린 위에 어깨에 망토를 두른 십여 명의 폭도들이 뛰 다니는 사진만 착잡한 눈으로 볼 뿐이었다.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 스타와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 믿고 있었다.
갑자기 가벼운 뭔가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문이 열렸다.
“거기 누구야?”
타오가 의자 끝에 걸터앉아 문 열린 입구를 쳐다보았다. 바닥의 직사각형 격자 환기구 위에서 둘둘 말려 있는 흰색 종이 뭉치가 오뚝이처럼 데굴거리고 있었다.
“꼬마 녀석들인가? 하기야 내일이 바로 목 빠지게 기다려 온 여행 날인데, 걔네가 순순히 낮잠을 자러 가겠어?”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후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는 언짢은 기분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변의 먼지가 쌓인 다른 의자 사이를 살폈지만, 환기구 위에 펼쳐진 채 가만히 놓여있는 종이 뭉치 말고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 데도 바람이 돌아다닐만한 창문은 없었다.
“여기서 밖으로 나갈 땐 신원 인증이 필요 없어. 방금까지 누군가 여기에 있다가 밖으로 나간 것 같은데?”
타오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그저 무료한 표정으로 홀로그램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소리가 꺼진 공군 부대 상황실의 사람들은 마치 전설의 보물섬을 발견한 선원들처럼 손을 흔들었고, 눈빛은 하나같이 겁이 없어 보였다.
“미안, 뭐라고?” 타오가 눈을 비비며 뒤돌았다.
작디 작은 푸른 점 위에서,
<블루닷 이펙트>
The Blue Dot Effect
흰 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