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야기는 현재(지구에서)와 과거(달)가 번갈아 가며 진행됩니다.
짧은 메시지 한 개.
하나는 숨 돌릴 여유 없이 계단을 향해 뛰어올랐다. 결코 예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수시로 교차하는 느낌이 끝나길 바랐다. 방금 전 예나와의 대화는 머릿속에서 저절로 지어진 이야기나, 잠시 눈을 감았을 때 본 환영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도 이처럼 조금의 평온도 없이, 분주하게 보내는 게 가능할지 궁금했다.
난장판이 되어 있는 조리실과 진흙이 한 바구니 튀긴 식자재 탕비실을 처음 발견하고 긴급 호출 신호를 보낸 건 조슈아였다.
“여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세요...”
그가 한 손으로 조리대를 내리치자, 허리춤에 달려 있던 쇠붙이들이 부딪히며 독특한 소리들을 냈다. 늘 바지 허리에 스위스칼 같은 조그만 공구나 생존 용품을 차고 다녔는데, 하나는 물론 재활원의 모든 사람들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특유의 쩔그럭 대는 소리로 자연스레 그를 떠올리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내려올 때 보니까, 건물 전체가 다 조용하던데.”
“타오가 혼자서 모든 아이들을 맡았고, 다른 분들은 환자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어요.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맞아, 오늘 몇몇 지역에 비상이 걸려서 공군부대에서 어떤 지침들을 내렸거든요. 아마도 일꾼들은 시설 안에 있는 모든 휘발성 물질들을 찾는 데 삼매경일 거예요.”
하나는 엉망인 바닥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조리용 도구들, 그리고 60온스 보다 작은 냄비들이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연두색 캐비닛은 큼지막한 일곱 덩이의 얇은 철판으로 분리된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흰색 바닥 타일엔 토마토 칠리소스, 바비큐 소스, 고추장, 발사믹 드레싱, 꿀은 물론, 냉장고 안에 보관된 온갖 종류의 액체들이 한 무리의 똬리를 튼 뱀들처럼 부어져 있었다. 색깔, 냄새도 각기 다른 식재료들은 정교하게 찌그러진 생일 파티의 풍선처럼 바닥에 둥근 모형들을 만들었다. 정제 블록 치즈 조각이 담겨있던 철제 통이나 선반 위의 다양한 간식 병들도 바닥에 굴러다녔다.
“근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줄래요?”
하나의 물음에 조슈아는 코로 짧은 숨을 뱉었다.
“프란츠가 복도의 화분 앞에서 여느 때처럼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길래, 저는 방금 그를 도와주다가 여길 지났습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참 엉망이네요.”
“하나, 이건 누가 봐도 그 ‘흰 꼬리’가 벌인 짓이에요. 오늘 같은 날에 그는 굳이 이런 철부지 없는 짓거리를 해야만 했을까요?”
조슈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뾰족했다. 그가 자기 어린 딸이나 아내를 대하던 때에 찾을 수 없던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교자... 아니, 그 남자를 말하는 거예요?”
“그 망할 흰 꼬리 녀석은 우리가 여기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까지 이런 파렴치한 짓거리로 조롱을 하는 거라고요.”
하나는 그의 차가운 눈빛을 피하려 약간 기울어진 한쪽 천장을 바라보았다. 은색의 격자 창틀 위로, 관리인의 손길을 받지 못해 수년을 과하게 자란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방금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홀아비에게 건넬 수많은 위로의 말들을 입 안에 머금고 있었지만, 맞장구 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동시에, 바닥에서 올라오는 악취는 따듯하고, 역겨웠다.
“조슈아... 여긴 저한테 맡기고, 일단 딸에게 가봐요. 당신은 오늘 너무나 큰 일을 겪어야 했으니까. 특히 아이들은 아직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해요.”
“아니요, 하나. 제발 들어봐요, 내가 말하려 하는 건 그게 아니라...”
조슈아의 얼굴이 모래처럼 무너졌다. 방금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는 간신히 서 있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그도 우리와 함께 하는 거죠..? 베루마스 프로젝트에...”
“네. 아마도.”
그녀는 마지못해 입술을 깨문 채 끄덕였다.
“과연 그 흰 꼬리가 우리와 함께 떠나는 게 옳다고 누가 말합니까? 무한하고 영원한 가상 세계로 그 추악한 범죄자들이 우리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그건 틀렸어요. 인권은 그런 게 아니에요.”
“진정해요. 그리고 일단 좀 마음을 추슬러 봐요, 조슈아. 지금 당신이 매 순간 감당하는 기분, 저로서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소중한 사람의 선택이 내 기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슬픔은 이해가 가요.”
그는 조리대에 등을 댄 채 미끄러져 내려갔고, 이내 키위 주스 범벅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밝은 회색 면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그림자처럼 젖어들기 시작했다. 특별할 것 없는 찬장을 마치 어떠한 두려운 죽음의 형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올려다보았다. 별안간 어깨가 조용히 들썩였지만, 입술은 돌처럼 굳어 아무 소리도 만들지 않았다.
하나는 자극적인 냄새가 진동하는 바닥 위를 조심스레 걸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주황빛이 도는 으깨진 젤리가 신발 앞코에 묻어났고, 발바닥은 끈적거렸다.
하나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기분이 이상하지 않아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가상 세계에서 삶을 계속 이어갈 테고, 망할 돌덩이가 떨어질 걱정도 필요 없을 텐데, 여기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게 왜 이리 아쉬운지.”
조슈아는 마른 팔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턱을 올렸다. 울적한 눈엔 붉은 몇 가닥의 실선이 나있었다.
“제 아내가 어쩌다가 두 다리를 잃게 되었는지 제가 얘기한 적이 있죠?”
그는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딱딱한 얼굴로 하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나는 대답을 하려다 멈추고 입술을 잘게 물었다.
“왜 수많은 생존자들 중 하필 그게 제 아내였는지, 요즘도 눈앞이 흐려질 것처럼 열이 뻗칠 때가 많아요. 어제까진 그나마 참을 만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걸 왜 참고 있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우리가 왜 그런 말종들에게 새 삶을 용납하는지,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달까...”
조슈아는 어떤 생각을 뒤적이듯 입술을 머뭇거렸다.
“그들이 혼란을 명분 삼아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힌 사실은 절대 잊히지 않을 거예요.”
“알겠어요. 조슈아, 그래도 이것만 확실히 해 둘게요.”
하나가 바닥에 눈을 내린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설교자가 폐쇄 도시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가 함께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란 것도, 그리고 재활원 사람들을 자주 불쾌하게 했다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거기서 어떻게 살아왔을지 아무도 모르고, 이곳으로 와서도 우리에게 위협을 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물론, 아미르가 우리 대신에 고초를 겪긴 했지만, 당신도 폐쇄 도시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갇혀있는지 기억하잖아요.”
조슈아가 말을 끊으려는 듯 볼을 움찔거렸다. 설교자를 향한 감정은 겉으로 볼 때 금방이라도 뚜껑을 밀어내는 냄비 같았다.
“그럼요. 내가 잘 알죠. 아닌가요? 제일 무거운 망치로 가장 연약한 뭔가를 내리치는 게 그 멍청하고, 또 역겨운 집단이 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결정이란 사실도. 자잘한 거 따질 것 없이, 그들이 한 개의 크고, 우둔한 덩어리일 뿐이란 걸 모르겠어요? 추악한 말벌 떼와 다른 게 뭐냐고요!"
그는 연달아 말을 토해냈고, 대답을 기다리듯 숨을 식식거렸다. “놈들에겐 환상적인 가상의 쉼터가 아니라, 알약이 주어져야 마땅해요. 아무 데나 쉽게 돌아다니는 바퀴벌레들에게 독약을 주듯이.”
하나는 그가 속을 끓이는 상황 때문에 퉁명스러워지는 걸 이해했다. 그가 설교자에 대해 노골적인 증오를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분명 모든 사람들도 조슈아가 어린 딸을 데리고 재활원의 모든 사람들을 인사하러 다니곤 했던 수많은 아침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통으로 밤을 새운 아내가 진통제를 먹고 잠에 든 낮시간에, 그는 아장아장 걸음을 떼는 딸의 손을 한 순간도 놓은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딸을 포함해 10명이 채 안 되는 재활원의 모든 아이들은 깔깔대는 웃음으로 늘 어른들에게 ‘끝’ 너머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들이었다.
아이들은 저항할 힘 없이 침묵에 모든 걸 내맡기던 어른들 주위를 성가시게 맴돌았다. 서서히 허릴 구부리며 숨을 죽여가던 어른들에게 그들은 괜히 말 한마디 걸어보려는 악동들, 혹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었다.
하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한 가정의 어엿한 아빠였던 조슈아가 변해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어디 가요?”
조슈아가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어서 여길 청소 해야죠. 그리고 저녁 식사도 준비해야 하고, 내일 떠나는 사람들의 명단도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하고, 누구와도 긴 얘기도 나눠야만 하는데, 왠지 일이 끊이질 않네요.”
하나는 더 이상 그에게 기대랄 것 없다는 심정으로 냉장고에 다가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미안해요, 조슈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녀는 고갤 숙인 채 이마를 냉장고에 기댔다.
“저도 도울게요.”
그는 한마디만 남긴 채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축축한 그의 바지 표면엔 작은 키위 씨앗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조슈아는 청소용 드론을 찾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뒤가 흠뻑 젖은 바지를 손으로 털며 조리실 밖으로 터벅이며 걸어 나갔다. 그녀는 유리 재질의 냉장고 문짝에 비친 스스로를 보았다. 지치고, 나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아래엔 온갖 식재료들이 뒤범벅된 타일 바닥이 있었다. 그녀는 손잡이를 당기기 전에 뭔가로 끈적거리는 신발을 내려보았다. 짓뭉개진 감의 과육과 자잘한 젤리 파편들이었다. 냉장고 선반에 큼지막한 유리그릇이 놓여 있었다. 뒤에 또 다른 그릇 하나가 더 있었다. 저녁은 물론, 내일 아침까지도 충분한 양이었다.
“그래도 설교자가 차마 요거트는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나 보네.”
그녀가 혼잣말을 뱉었다. 오늘을 위한 요거트를 덜어 둔 채, 밀대를 들고 복도로 걸어갔다. 바닥은 신발 모양의 칙칙하고 붉은색 자국들로 가득했다.
때 묻은 나무 밀대는 수십 년 된 것처럼 낡았다. 밀대의 폭은 조리실 입구보다 넓었다. 그녀는 밀 때마다 손잡이를 비틀었고, 고무 부분을 억지로 문 틀에 맞추려 했다. 고무가 매번 바닥을 비빌 때마다 소스들의 혼합은 먼지와 함께 점점 탁한 색을 띠었고, 수 십 가지의 오묘한 악취를 풍겼다. 그녀는 이를 꽉 물고 밀대를 당겼다.
다시 복도 쪽으로 나왔을 때 하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갤 돌리자 부드러운 햇빛이 자리한 복도의 중간쯤엔 기부를 받은 책과 잡지들이 가득했다. 책꽂이와 배불뚝이 동양화분이 놓여 있었고, 곧게 늘어진 그림자들은 하나와 또 다른 누군가 사이를 나누는 경계 같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뭔가가 그녀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는 옆으로 몇 걸음을 움직였다. 휠체어였다. 반으로 잘린 망고처럼 생긴 좌석에 오직 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 남자는 프란츠가 확실했다.
그녀를 본 프란츠가 말없이 고갤 기울였다. 거의 정중한 인사 같았다.
“거기서 뭐 해요?” 하나는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휠체어의 바퀴가 미끄러지듯 방향을 바꿨다. 남자는 그대로 사라졌다.
재활원 건물의 곳곳은 한창 유리 깨지는 소리로 즐비했다. 공군 부대에서 온 지침대로, 자발적 일꾼들은 모든 병실의 창문들을 파열시키고 있었다. 흰 꼬리들에게 생존에 결코 이상적일 수 없는 환경을 남겨두려는 목적이었다.
흙과 요거트가 뒤섞인 땅에서 독특한 비린내가 올라왔다. 하나는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병에 남은 물기를 전부 흩뿌렸고, 모종삽과 빈 그릇 옆에 내려놓았다. 입에서 나오는 숨들은 차갑기만 했다.
2층 병실에서 작업하던 일꾼 중 한 남자가 바지를 털면서 창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하나 씨! 오늘은 어디서 모이는 거야?”
그녀는 곧바로 다섯 손가락을 펼치며 소리쳤다. “5층! 보행교정 트랙이 있는 치료실에 다 같이 모이기로 했어요!”
일어선 엄지가 대답으로써 돌아왔다. 하나는 문득 스타가 있는 병실을 올려다보았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마음은 벌써부터 조급했다.
복도를 따라 마지막 저녁 만찬을 실은 카트의 딱딱한 바퀴소리가 이어졌다. 타오는 수시로 뒤를 돌아보았고, 하나는 결심한 등반가처럼 그녀 뒤를 따랐다. 며칠 전 그녀가 발견한 나무수레는 두 바퀴를 고정하던 핀이 빠져버린 탓에, 그들은 잿빛 병실들을 돌아다니며 다른 수레를 찾아야 했다. 결국 진단 장치를 수고로운 짐처럼 들고 있던 은색 받침대 가 가장 쓸모 있었다.
계란, 감자가 들어간 수프의 향기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 하나는 거대한 요거트 대접 아래칸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미리 옮겨둔 도시락 몇 개를 더듬었다. 설교자와 스타를 위한 도시락이었다. 그 옆엔 다 쓴 행주 같은 천이 뭔가를 덮고 있었다. 열기에 바싹 마른 소시지, 통조림 완두콩, 나초 등, 자잘한 간식들이 담긴 도자기 접시들이었다. 그건 스타를 위해 배식 때마다 조금씩 숨겨둔 것들이었다. 그녀는 접시 옆의 피라미드 모형 기기가 린넨 바깥으로 튀어나왔는지 확인했고, 다시 카트를 밀어붙였다. 요거트의 표면이 솟아오르며 끈끈한 파도처럼 요동을 쳤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어울리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내온 사람들끼리 저녁상을 차리는데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이 허리 스트레칭 기구를 타고 오르며 노는 동안, 그들은 마사지 침대 위에 흰색 쿠션 매트를 깔고서 식탁이라 정하고 있었다. ‘누가 언제 이런 농담을 했고’, ‘그것이 지금 같은 상황에 얼마나 웃긴 생각일 수 있는지’ 떠들썩한 그들의 수다는 음식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솥단지와 같았다. 매 새로운 날은 그들이 살아본 가장 풍요로운 시기인 듯 보였다.
“타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포도주는 없겠지?” 발칸 반도 어딘가에서 와인 양조장을 운영하곤 했던 자코브가 눈으로만 웃으며 물었다. 매서운 섬바람에 불평이 잦았던 그는 근래에 들어 울릉도가 독일처럼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기 제격이라 장담하곤 했다. 정적 속에 모두가 입술을 꿈틀거렸다. 하나는 그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인 채 카트를 밀어 식탁의 바로 옆으로 붙였다.
“아니면, 포도 주스라도?”
웃음이 크게 터져 나왔다.
에어로빅 운동용 발판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은발의 노신사가 모자를 들고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하나, 우리의 자비로운 달.”
그녀는 짧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컵 뭉치를 꺼내 들어 사람들 수를 세기 시작했다.
프란츠가 전면이 거울로 된 벽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파란색 고무공 하나가 휠체어 앞에 놓여 있었다. 그가 품은 분위기는 아침과 전혀 다른 색을 띠었다. 척추부터 앞으로 뻗은 거북목까지 이어진 윤곽은 코에서 입가로 이어진 주름과 비슷했다. 전보다 힘겨워 보이는 얼굴 앞에 놓인 고무공은 응어리진 고통처럼 보였다.
그녀는 프란츠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그는 코를 움찔거렸다.
“늦어서 미안.” 아미르가 돌돌 말린 매트를 팔에 낀 채 걸어왔다. “빅토리아는 방금…”
“옥상에?” 하나가 그의 빠른 대답을 기다리듯 눈을 크게 뜬 채 고갤 끄덕였다.
“응, 오늘 많이 피곤했나 봐. 방금 낮잠에서 깨어났어. 근데...”
요거트 대접의 비닐 랩을 걷어내던 그녀가 다시 아미르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괜찮아? 너 얼굴빛이 창백해 보여.”
“괜찮아, 조금 추워서. 걱정할 거 없어.”
그녀는 요거트로 가득 채워진 대접을 서둘러 저었다.
“주말에 눈이 내릴 거란 말을 어디서 들었던 것 같아. 근데 맑은 것 보면 아직 아닌가 봐, 안 그래?”
요거트는 만든 지 거의 일주일이 되어 위쪽이 묽고 탁했다. 하지만 그녀가 단단한 손으로 국자를 휘젓자 곧 부드러운 점성을 띄었다. 느릿한 움직임에 따라서 요거트 표면을 차지하던 유청이 사라지고, 가운데 어두운 골이 파였다. 나선형으로 깊어지는 소용돌이 형태는 그녀의 마음 역시 잠시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잡티 하나 없는, 완전한 흰색의 질감에 빠져들고 싶었다. 아미르는 눈썹을 올렸다.
타오의 주위에서 사냥 놀이를 하는 아이들 중 분홍색 줄무늬 수건을 망토처럼 어깨에 두른 여자아이가 잠자코 하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자기 키보다 긴 수건을 꼬리처럼 바닥에 끌고 하나에게 뛰어가, 갑작스레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간 바늘에 찔린 듯 놀란 하나가 팔을 들어 올렸다. 작고 구불구불한 오솔길 같은 아이의 정수리가 옆구리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고,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나는 오늘 바닷가에 갈 거예요!”
“정말로? 좋은 생각이야... 근데 오늘은 너무 추울 것 같으니까, 내일 가는 건 어떨까?”
하나가 여자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아빠가 그러는데, 엄마가 바닷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데요. 맨 위에 삼각형 모양 창문이 달려 있는 통나무집을 지으면서. 그리고, 또…”
여자아이가 눈을 굴리며 말 끝을 늘어뜨렸다. “우리는 거기에 살 수도 있어요. 거긴 하나도 안 추우니까. 왜냐하면, 그 바다가 전부 구름으로 만들어져 있거든요. 솜사탕처럼.”
“재미있겠다, 집이 바다랑 가까우니 매일 수영도 할 수 있고.” 하나가 그녀의 땋은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는 고갤 이리저리 흔들었다. 고사리 같은 어린 손에 들린 빨간 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식탁 아래로 굴러간 공은 요란스러운 대화에 한창인 사람들 발치에 이리저리 차였고, 다시 유리문이 있는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나는 고갤 들었다. 조슈아가 불안한 듯 눈가에 진 조개껍질 같은 주름만 긁적였고, 곧바로 그녀의 눈을 피했다.
“잠깐, 이게 누구야?” 신이 난 아미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는 그가 오후에 아이들과 겨루던 칼싸움을 다시 이어가는 거라 생각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저녁을 먹고 싶었구나? 우리랑 다 같이?” 그의 물음은 짓궂은 여러 아이들을 한 번에 상대하던 이전 목소리와 달랐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반응 역시 평소 같지 않았다. 꿈결이 아닌, 바로 몇 걸음 앞에서 벌어진 기이함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는 완충 쿠션을 방패 삼아 한 손에 들고 있던 남자아이가 제자리에 서 있는 걸 보았다. 땀에 젖은, 불그레한 얼굴로.
“스타, 잘 왔어. 여기로 와서 우리와 같이 있자.”
스타가 제 의지로 혼자 재활원의 층들을 나돌며, 사람들이 몰려 있는 장소를 찾는 건 더 어린아이들의 눈에도 생소한 일이었다. 모두 다리 건너편 불구경을 하듯, 그렇게 몇 초가 흘러갔다. 하나는 풍선 공기처럼 순식간에 달아나버린 숨이 되돌아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입을 벌리려 했다. 뭐가 기쁨이고, 뭐가 불안인지 헷갈렸다.
무리 중 한 어른이 손을 내밀었다. 스타는 바지 왼쪽의 박음질 부위를 꼬집고 서 있었다. 그는 화살처럼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여러 눈들을 피했지만, 두려움은 없어 보였다.
하나는 분명 그에게 뭔가를 더 기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이었다.
스타가 굳은 얼굴로 방 안에서 벌어지는 달고 쓰거운 저녁 만찬을 둘러보는 와중, 그들은 함께 놀 친구가 하나 더 생겼다는 즐거움뿐이었다. 그들은 스타의 다음 행동을 걱정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저 모든 새로운 건 흥미로 받아들였다. 한 남자아이가 스타가 갖고 있지 않은 팔 부위를 손으로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이 팔은 타오의 팔이랑 다르게 투명해.”
둥근 금색 고리 귀걸이를 한 아이 엄마가 아들을 다그쳤다. 나머지 사람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그를 싱글벙글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하나는 요거트 컵을 손에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채, 스타의 안색과 몸짓의 변화에 주의했다. 그녀 손가락 끝에 매달린 컵이 버티지 못하고, 점점 미끄러져 내려갔다. 웬일인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를 보는 건 우상을 만난 것처럼 손 떨리고, 낯선 일이었다.
하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동시에 풀리지 않는 의문과 애정, 그리고 약간의 화도 남아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매 순간 변모하는 스타의 잔영은 그녀가 매일 마주해 온 모습과 같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그를 돌봐온 시간 중 일부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멀리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던 그의 첫 모습이 기억에서 생생했다. 그녀는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아직 상하지 않은, 무색무취의 요거트가 코에 역겨운 휘발성 도료처럼 다가왔다.
스타가 음식을 거부하는 의미로 어른들의 손을 뿌리치는 동안, 하나는 그를 향해 온 신경을 기울이려 했다.
“마지막 날에 와서야 스타가 우리를 찾아오는 일도 생기고, 별일이 다 있네, 그렇지?”
“이리 와, 친구야. 괜찮으니까, 여기 앉아.”
하나는 그를 주시하는 동안 떠올린 생각들을 떨쳐내고 싶었다. 그건 단숨에 자신을 추악한 땅까지 끌어내리는 짐, 무게 추, 혹은 수수께끼였다. 스타가 지금처럼 계속 말을 하지 않길 바랐다. 그가 뱉은 첫 단어가 현실을 연필처럼 똑 부러뜨릴 수 있었다. 차라리 스타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런 말소리도 내지 않길 바랐다. 그의 작은 발동작부터 한 모금의 숨결까지 한 다발의 다이너마이트로 연결된 각각의 뇌관들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는 발가락 끝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무서워할 거 없어, 스타. 네가 처음 이곳에 올 땐 의식이 희미했던 상태라 기억이 많이 없겠지만, 우린 예전에 다 만난 적이 있어.” 부스스한 검은 머리의 여인이 말했다.
스타는 왜 사람들이 자신을 스타라 부르는지 아리송했다.
아미르가 스타의 작은 어깨에 손을 얹고서 빈자리로 데려가려 했다. 때마침 다른 꼬마들도 그들 주위에 모여들었다.
“아이들도 너를 오랜만에 만나서 기뻐하는 거야.”
타오가 쿠션이 덧대여진 기다란 평행대를 들고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스타랑 여기에 앉을게.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 나타났는데, 긴장될 만도 하잖아. 얘들아, 너희들은 저기로 가서 엄마 옆에 앉아.”
스타의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덫에 걸린 뒷발을 빼내려고 몸부림치는 스라소니처럼 쏜살같이 어깨를 비틀었다. 그러던 순간, 그는 유일한 손으로 아미르의 가슴팍을 확 밀쳐냈다. 사람들은 또다시 말을 잃었다. 하나는 그의 눈에서 노란 섬광같이 반짝이는 뭔가를 볼 수 있었다.
스타는 흰색 매트 식탁을 반 바퀴 지나, 그녀에게 걸어갔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설명할 겨를도 없는 듯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두 팔을 움츠렸고, 눈을 감았다.
카트가 옆으로 크게 기우뚱했다. 그리고 눅진거리는 하얀 요거트가 순식간에 바닥을 향해 수많은 하얀 손들을 뻗었다. 귀를 찌르는 두껍고, 날카로운 소리가 이어졌다. 두툼한 유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 다양한 모양으로 깨진 대접 조각들 중 몇 개가 바닥에서 반짝이며 팽그르르 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당혹감에 목구멍이 틀어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아미르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타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났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그녀의 팔 뒤로 숨어들었다.
스타는 분명 모두를 경계하면서, 동시에 근심이 깃든 눈빛이었다.
그때 공중에 들려 있던 하나의 손이 번개처럼 떨어져 스타의 뺨을 갈겼다. 아이는 머리카락까지 전기가 뻗친 듯 보였고, 뒤뚱거리며 세 걸음을 물러났다. 그는 한 팔을 휘두르며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생생한 고통과 현기증의 표식이 그의 얼굴 위에 피었다.
하나는 잠시나마 겉으로 드러낸 극적이고 현란한 감정을 어찌할 줄 몰랐다. 그림자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얇은 뺨이 아직도 손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따갑고 쓰라린 촉감. 그건 단지 하나 혼자만의 느낌이었다. 공간엔 숨 쉬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스타는 자기 손을 뺨 옆으로 가져가 종이 덩이처럼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금방 차가운 눈빛을 드러냈다. 그의 한쪽 뺨은 그렇지 않았다. 얼음 같은 바닥에 생기 없는 그의 맨발이 조금씩 움직였다. 3초 남짓 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스타는 하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해.”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순간은 시간과 함께 씻겨 내려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스타는 복도를 향해 뛰쳐나갔다.
누구도 그에게 손 뻗을 수 없었다. 그는 안개가 바람을 만나듯이 사라졌다. 복도에선 뭔가가 부딪히거나 미끄러지는 소리, 또는 심지어 뜀박질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스타의 등장은 2층 병실에 깃든 유령의 장난이었을 수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소년의 가명을 목청껏 소리치며 뒤따라 달려갔지만, 하나는 땅에서 조금도 발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사각형 문에서 차츰 투명해져 가는 스타의 잔상을 더듬었다. 향수가 말라 들고 종이가 녹는 것처럼 다른 아무것도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다. 넓게 팔을 휘두르는 아미르의 선명한 윤곽도 그녀에겐 기껏해야 한 무의미한 형상이었다.
하나는 시야에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차츰 주변을 인식했다. 뒷목을 찔러대던 바늘 같은 두통은 멎어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앞에서 눈썹을 찌푸리던 아미르가 언제 사라졌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노인들은 흰 매트의 도시락 앞에서 엄숙한 얼굴로 포크 손잡이만 주물렀다. 아이들은 타오 옆에서 얼쩡대며 걸레질을 방해하고 있었다. 뒤이어 바닥에 흩어진 완두콩들과 젖어있는 린넨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묵사발된 간식들은 지칠 줄 모르고 부풀어 오르던 기대가 터지고 남은 잔여물 같았다.
그녀는 손에 잡히는 뭐라도 해야 한다고 느꼈다. 일단 무작정 앞으로 발을 디뎠다.
“하나.” 타오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너무 신경 쓰지 마.”
하나는 그녀를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두 개의 파란색 고무공이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거울을 향한 그녀의 맥 풀린 시야에 똑같은 두 공들은 제자리에서 격하게 진동하는 듯 했지만, 하나는 실재하지 않았고, 어쩌면 모두 그러했다.
작디 작은 푸른 점 위에서,
<블루닷 이펙트>
The Blue Dot Effect
모든 이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