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 여성 신과 강인한 생명력
제주 토박이인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주 문화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제주 문화의 궁금한 점들을 깊이 있게 알고 싶었고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강의를 찾아서 수강했다. 또한, 애들과 제주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제주 환경과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을 금 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지혜롭고 배려 깊고 따뜻한 인정이 넘쳤던 공동체적인 제주 문화와 전통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스 신화나 중국 신화가 우주와 인간 역사의 운행질서를 주된 테마로 하는 거대담론적 설화라면 제주신화는 소박한 민초들의 애환을 그린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느껴지는 설화이다. 제주신화의 주인공들은 낮은 눈높이의 존재들이다. 그들에게는 대다수의 민중이 안고 있는 수수하지만 본질적인 인생문제, 태어나고 죽어가는 생사의 문제나 한 마을 남녀 간의 사랑과 미움과 시샘 같은 것들이 주요 관심사인 것이다
제주신화 주인공들에게 맡겨진 역할 분담의 내용을 살펴볼 때, 가정과 사회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위험과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따뜻이 보살피는 돌봄의 역할 대부분이 여성 신들에게 맡겨져 있다. 위난에 처한 사람에게 돌봄이 손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남성신이고 누구에게 돌봄의 역할을 맡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남성신들이지만 정작 돌봄의 손길 자체는 여성 신의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제주 신화 주인공들의 권력구도를 개관할 때, 전체적이고 대국적인 권력은 남성신들에게 돌아가고 세부적이고 소규모적인 권력은 여성 신들에게 돌아간다. 인간 세계의 질서 전체를 총괄하는 최고신 천지왕, 세상 사람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쥔 죽음과 환생의 신 이공신, 굿판을 벌이고 저승신들과 교신하는 초능력의 무조신 등 남성신들의 권능 행사는 대체로 거대하면서도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인 인간생활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제주 신화의 여성 원리로는 돌봄의 원리( 강인한 생명력), 감성의 원리(동적인 애정표현), 화합의 원리(체제 순응적인 애정 패턴), 공생의 원리(유화적인 사랑 다툼)로 말할 수 있다. 아기를 잉태시키고 분만시켜주는 삼승 할머니 신(멩진구따님), 신생아의 건강을 지켜주는 일뤳당신, 인간사 성패의 운명을 결정하는 삼공신(가믄장아기), 각 가정의 쌀독을 지켜주는 칠성신, 오곡의 씨를 갖다 주고 농경법을 전해준(문도령처럼 명복적인 농경신이 아니다) 실질적인 농경신(자청비) 등 여성 신들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사에 밀착된 자상한 돌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멩진국대감의 따님으로 태어났다가 출산신이 되어 신생아를 잉태시키고 분만시키는 일을 맡는 삼승 할머니 신은 돌봄의 여성 원리를 구현하는 대표적인 예이면서 제주신화에서 가장 위세 높은 신이고 가장 많은 치성을 받는 신이라 할 수 있다. 장설룡의 딸과 일곱 외손녀는 뱀의 몸으로 현신하여 각 가정의 곡식창고를 지켜주고 풍요와 다산을 주재하는 풍농신이 되어서 가정경제를 돌봐주는 위치에 있다.
삼공본풀이에서 운명신으로 좌정하는 가믄장아기는, 부모에게 입에 발린 아첨을 하는 언니들과는 달리, 당찬 담력과 비상한 영험을 발휘함으로써 착한 총각 작은마퉁이를 행운의 길로 인도한 다음에는 거지신세가 된 장님 부모에게도 행복한 여생을 맞게 해 준다.
김진국 대감의 무남독녀 자청비가 인간사회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농경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음은 뛰어난 지혜와 담력으로써 숱한 고난과 위험을 이겨낸 가상한 공업 때문이다. 자청비가 구현하는 돌봄의 미덕은, 인간사회의 생업을 보장하는 농경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남성의 취약점을 보살피고 내조하는 자상하고 따뜻한 여성상으로서도 돋보인다. 자청비가 보여주는 자상한 보살핌의 여성상은 그 사례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자신의 배필로 택한 문도령이 아둔하고 미온적인 성격이어서 애정 구현의 과정에서 수많은 장애를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신만고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의 아버지 옥황상제로부터 허혼을 얻어내는 자청비의 모습은 남성 세계의 빈약한 감성능력을 감싸주면서 섬세한 돌봄의 여성 원리를 구현한다고 생각된다.
자청비는 남편의 외도와 불량배들의 훼방을 자신의 지혜와 담력으로 막아내며 일천 선비들의 유혹을 당차게 물리친다. 또한, 약을 잘못 먹고 죽은 문도령을 살리기 위해 남장을 하고 서천꽃밭으로 가서 꽃감관의 막내딸과 위장 결혼까지 해가면서 환생꽃을 얻어다가 남편을 살린다. 문도령과 함께 글공부를 하기 위한 전략으로 남장 차림의 서생으로 나선 것이 순진한 시절 구애 단계의 방편이었다면, 인간의 생사를 판결 짓는 지엄한 서천꽃밭으로 들어가기 위해 남장 차림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으로써 사랑의 성취에 다가가는 것이다.
자청비는 하늘나라 전쟁에 참가하여 승리함으로써 그 공으로 좋은 벼슬을 할 수도 있었지만 제주도로 낙향하여 돌봄의 여신으로 정좌하기를 원한다. 오곡의 씨앗을 받아 가지고 지상으로 내려온 자청비는 인간세상의 농경신으로 좌정하여 생산과 풍요라는 여성성의 역할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이 강력한 여성상은 제주신화에 나오는 러브 스토리들의 빈번한 모티프로 되어있다.
강력한 여성 역할이 제주신화의 특징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 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기자불공의 시주가 한 근이 모자라서 딸이 태어난다는 화소가 <초공본풀이>, <삼공본풀이>, <세경본풀이>, <칠성본풀이>, <월정리 본향당본풀이> 등 제주신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렇게 태어난 딸이 결국에는 집안에 행운을 가져오고 기대 밖의 기적을 이루어준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들 낳기를 기원하여 불공을 드리는 것은 분명히 명목상 남성 우위 문화의 한 사례이지만 제주신화의 여성 주인공들이 이루어내는 기적적인 행운과 공훈은 제주 역사의 반영으로서의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문명시대 이후 인류의 과거사가 대체로 남성 우위의 역사라고 하지만, 제주의 역사에서 남성 우위는 명만 있고 실은 없어서, 명실이 상부하지 않는 표리부동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