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에 묻혀버린 계절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집 뒤에는 야트막한 산 하나가 있다. 깊어가는 가을이면 산 중턱에는 은빛으로 일렁이는 넓은 억새밭이 장관이다. 한들한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사각사각 흔들리는 갈대의 노래가 감미롭다. 가끔 외롭고 지칠 때 혼자 찾아가 숨을 고르는 곳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주말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 살랑이는 억새꽃을 보며 메말라가는 마음을 촉촉이 적셔보고 싶다.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아파트 쪽문으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삼삼오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 정겹다. 솔솔 풍기는 솔향에 취해 한참을 오르다 보니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가 들린다.
산 중턱 억새꽃 군락지 입구부터 천막을 치고 체험 부스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봉재산 억새꽃 축제”를 하고 있다. 행사장에는 이미 인산인해다. 봉제산 이야기도 안내되어 있다. 군부대가 있어 많이 훼손되었던 곳인데 부대의 이전과 함께 구에서 정비하고 다듬어 구민들의 쉼터로 탈바꿈된 곳이다. 억새밭 사이사이 체험 부스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솟대 만들기, 인천 섬 이름 맞추기, 어린이 동물 체험, 연 만들어 날리기. 반려 식물 원예 체험으로 다육식물 심어 보기, 전통문화체험과 다양한 먹거리까지 준비되어 있다. 가족 단위로 즐기기에 좋을 것 같다. 모든 부스에는 많은 사람이 길게 줄지어서 있다.
혼자만의 호젓한 가을 나들이가 갑자기 축제로 변하니 약간은 당황스럽다. 아름다운 억새꽃의 향연을 그리며 올라왔건만 축제 체험 부스들로 억새꽃은 가리어져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체험 부스를 한 바퀴 둘러보던 중 이색 체험 부스가 눈에 띈다. ‘나라 사랑’ 부스다. 태극기 밑그림이 그려진 에코백에 색칠해서 내 가방을 만든다. 거기에 큰 가정용 태극기와 작은 깃발의 태극기를 나누어 주는 부스 앞에 걸음이 멈춰졌다. 줄을 서서 기다렸다. 좀은 생소하고 뜻깊은 체험이다. 한참을 기다려 에코백과 태극기를 받아 색칠하고 나니 별로 관심을 끄는 특색 있는 부스가 없다. 더는 긴 줄을 기다려 다른 체험은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주 무대에는 오색의 알록달록한 만국기가 가을바람에 펄럭인다. 만국기를 보니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의 추억이 떠오른다. 운동장을 가득 덮은 만국기 아래로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여 치르는 동네잔치였다. 이 축제도 구민 모두가 참여한 듯, 잔치 분위기로 떠들썩하다. 사회자의 열정적인 목소리에 끌려 주 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의자가 무질서하게 놓여 있다. 더워서 앉을 수가 없다. 다들 그늘을 찾아 앉느라 의자를 들고 이리저리 옮긴다. 햇살이 아직은 따가운데 천막이라도 쳐놓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어수선해 보인다. 각 부처장의 인사말에 이어 장구에 징. 북과 꽹과리 등 다양한 전통 악기를 흥겹게 두드리며 풍물패가 등장한다.
평소에는 억새꽃이 화사한 은빛의 자태를 뽐내며 바람결에 살랑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이 평화롭던 곳이다. 한데 온통 천막으로 둘러싸여 가을 정취라고는 느낄 수 없다. 이 좋은 계절 자연의 아름다움을 축제 분위기에 묻혀 볼 수 없음이 못내 아쉽다. 시장 한복판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지… 체험 부스를 억새밭 주변으로 넓게 배치했더라면 그림 같은 억새꽃의 물결로 눈 호강도 하며 축제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멋지고 깔끔하게 그려놓은 풍경화 위에 물감을 덧칠해 복잡 미묘한 그림으로 변해버린 느낌이다. 가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계절이다. 우연히 만난 가을 축제에서 가을도, 축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아쉬움을 간직한 채 시끄럽고 정신없는 축제장에서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