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으로 대접받기
“지공거사(地空居士)가 될 나이가 되어간다.” 어느 문우의 글에서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지공거사(智恭居士)란 지혜롭고 겸손함을 갖춘 덕망 높은 노인을 칭송하는 고사성어인가 하고 생각했다. 확신이 없어 친절한 네이버님에게 물었다. “지공거사란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노인”이란다. 신조어로 지하철 공짜로 타는 사람을 줄임말로 표현한 것이다. 나도 지공거사(地空居士) 노인으로 이런저런 혜택을 받을 나이에 들 날이 그리 머지않아서인지 좀 씁쓸하다. 왠지 노인을 폄하하는 말같이 느껴진다.
내게는 위로 띠동갑 친구가 있다. 젊어서 일을 많이 해서인지 다리와 허리가 아프다기에 노인분들이 저렴하게 운동하실 수 있는 수영장을 알려 드렸다. 고마워하신다. 그런 인연으로 가끔 만나 이야기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노인들에게는 참 좋은 나라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노인들이 할 일 없이 집에만 있다 보면 여기저기 아픈 곳만 생긴단다. 거기에 무료한 시간은 많으니 양방 한방 병원을 번갈아 가며 병원을 취미 삼아 돌아다닌다고 말씀하신다. 건강보험센터에서 노인들에게 지원되는 병원비의 부담도 커지고 아픈 노인만 늘어 나는 추세란다.
정부에서는 그런 노인들에게 하루에 잠깐씩 밖으로 나올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공원을 산책하며 쓰레기도 줍게 하고 작으나마 용돈벌이도 할 수 있도록 노인 인력을 활용한다고 들었다. 오전 공원에 잠깐 나가 산책 겸 쓰레기를 줍고 오후에는 지하철을 타고 관서에서 운영하며 노인들을 우대하는 체육시설을 이용하신다. 적은 비용으로 수영과 헬스를 즐기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덕분에 아프던 다리와 허리도 튼튼해지고 노년을 활기차게 보내시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노인들께 주는 이런 다양한 특혜가 고맙고 좋은 제도로 느껴졌다. 젊은 시절 국가 경제를 위해 애쓴 분들에 대한 보상쯤으로 생각되었다.
어느 주말 서울에서 친구 여식의 결혼식이 있었다. 오랜만에 높은 구두에 원피스로 한껏 멋을 부리고 지하철을 타고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오랜만에 신은 구두에 원피스가 불편하다. 피곤하고 다리도 아프다. 지하철이 도착하기 무섭게 문가 기둥 옆에 빈자리 하나를 발견하고 잽싸게 달려가 앉았다. 두어 정거장을 지나자 백발에 노신사 한 분이 커다란 가방 하나를 들고 전철에 오른다. 당연히 노약자석으로 가련했다. 그런데 내 옆자리 기둥에 기대어 선다. 내가 양보해 주길 바라나 싶은 마음에 나도 피곤한데 마음이 쓰인다. 노약자 석을 보니 한 자리가 남아 있다. ‘속으로는 저기 가서 앉지 왜 여기 서 있을까?’ 눈치를 살피다 마음이 영 편치 않아 엉거주춤 일어서며 “어르신 여기 앉으시죠?” 하고 말했다. “아니요. 바로 내릴 거라서요” 하고 말씀하신다. 휴~ 하고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편히 앉았다. 말씀드려 보길 잘했다 싶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종일 바쁜 업무에 시달리며 지치고 힘들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나이 든 사람이 옆에 서 있으면 꽤 불편하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니 그들은 ‘노인들이 집에나 있지 왜 그리 나돌아 다니냐?’ 혐노(嫌老)라는 말까지 한다. 지공거사(地空居士)들도 젊은 사람의 입장을 조금은 헤아려 당연히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지양해야 할 태도다. 그리고 출퇴근으로 복잡한 시간은 가급적 지하철 이용을 피해 주는 것도 나이 든 사람의 지혜 중의 하나라 생각한다.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노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공거사(地空居士)들도 나름 젊은 사람들의 눈치를 본단다. 매스컴에서 매번 노인들 때문에 지하철이 적자니 뭐니 하니 거북해한다. 일부러 돈을 내고 타는 사람도 적지 않고, 노인 우대권 만들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얼핏 들은 뉴스에서 노인의 기준을 75세로 연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를 보면서 정년도 연장하고 노인들이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준다면 할 일 없이 지하철을 전전하며 눈치 보는 지공 거사(地空居士)는 줄어들 것이다. 젊은 시절의 공을 높이 평하여 어른의 예후로 지하철과 문화 혜택을 조금은 저렴하게 혹은 무료로 떳떳이 누릴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에 부합하게 지공거사(地空居士)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사람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지공거사(智恭居士) 지혜롭고 겸손함을 갖춘 노인이었으면 한다. 노인들에 대한 국가 지원이 하루속히 제도와 인식의 개선으로 기쁘게 베풀고 떳떳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도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