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내 팔레트 담긴, 블루
오늘은 바다를 닮은 컬러를 소개하고 싶다. 블루, 내 파란색이다. 에세이 중,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했던 회차가 있었다. 내가 박블루를 파란색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박블루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졌고, 해양생물을 품는 깊은 이해심을 가졌다. 고등학교의 수학 교사이며, 자신의 직업을 단지 월급으로만 보지 않고 제자들과의 ‘문.’으로 생각하는 남자이다. 그는 내 남편이다.
박블루씨와 나는 대단히 공적으로 만났다. 지자체에서는 커플을 매칭해 출산율을 증가시키고자 했는데 그것이 미혼남녀 매칭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그 행사장에서 만났다. ‘한자녀더갖기운동 본부.’에서 주관한 행사에서 만나 결혼한 우리는 정작 아직 아이가 없다.
남편의 첫인상은 성실했다. 프로그램의 시작, 각자의 연애관을 알아보는 조별 활동에서 그와 나는 팀이 되었다. 목에 거는 조그마한 카드에 직업과 취미를 적었는데 남편은 굳이 적지 않아도 될 정보까지 진솔하게 적어넣었다. 그래서 나는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걸 알게 되었다.
키가 조금 작고, 동그라미를 닮은 남자. 별명은 잔망 루피, 곰돌이 푸, 도라에몽으로 불리는 내 남편은 치명적으로 귀엽다.
남편을 만나기 전의 나는 꽤 인기 있는 여자아이였다. 소개팅에서는 늘 애프터를 받았으며 이성의 플러팅에 익숙했다. 그러나 남편을 만나던 시기의 나는 약물 부작용을 앓고 있었다.
30킬로그램이나 늘어난 몸무게. 얼굴은 달덩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부어올랐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남성은 30명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내게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않았다.
그 행사는 나에겐 조금 무거운 의미가 되었다. 누구나 좋아한다는 20대를 넘어 30대에 접어든 내 삶이 여자로써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퉁퉁하게 살이 오른 내 모습 때문에 주눅이 들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자신감 없는 내 모습이 문제였던 것 같다.
행사장에서 가장 뚱뚱했던 여자는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당당하게 커플로 매칭되었다. 괜히 주눅이 들어서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한 내 태도가 매력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두 번째 만남은 뒤풀이 행사였다. 그곳에서 남편은 나에게 ‘지금도 너무 예쁘다.’라고 해주었던 유일한 남자였다. 성실한 남편은 그때에도 행사장에 2등으로 도착한 참가자였다. 그가 오는 것을 지켜본 나는 당연히 1등으로 도착한 참가자였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행사가 시작하기 20분 전에 미리 도착해있었다. 2등으로 도착한 남편은 멀뚱히 혼자 앉아있는 내 앞에 자리했다. 술자리에서 나는 ‘요즘 자신이 없는 내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앞자리에 앉았던 남편은 내가 얼마나 미인이고 매력적인지에 대해서 위로하듯이 말해주었다.
단순한 위로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 수 없었는데, 남편은 내 번호를 물었다. 남편은 내 첫인상에 대해서 ‘사실 좀 무서웠어.’라고 말했는데, 뇌 기능이 저하된 상태에서도 나는 꽤 똘똘해 보였다고 했다. 나는 왜 야무지고 똘똘해 보이는 게 무서운지 이해하진 못했지만, 본래 나를 무섭게 기억하는 사람은 많았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블루는 늘 나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려주는 남자가 되었다.
나와 결혼하기 전, 남편은 매일 출근하기 전 뽀뽀를 하게 될 줄 몰랐다고 한다. 남편이 퇴근하면 나를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 나가 그에게 진한 포옹을 한다. 하루를 무사히 마친 축하의 의미이다. 잠들기 전에 남편은 아내에게 매일 팔베개를 해주는 남자가 되었다. 매일 반복된 사랑으로 점철된 루틴에 남편이 기뻐하는지는 의문이다.
남편의 좋은 점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 예쁜 말을 하는 남자라는 것이다.
주변에 가정불화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지인이 있는가? 그들과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면 내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나에게 결혼생활이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구속처럼 보였다. 행복한 가정이라곤 동화 속에서만 보았던 31살의 김맑음은 결혼 후 행복한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남편과 만날 당시, 치료받고 있던 나의 병은 유전될 확률이 다분했다. 30퍼센트의 확률로 나는 내 아이에게 질병을 옮길 수 있었다. 내가 아픈 것보다 내 아이가 아플 것이 더 무서웠다. 나는 아직 아픈 아이의 어머니가 될 각오를 하지 못했다. 막상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땐, 불임 상태라고 들었으니 인생이 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남자친구인 블루에게 솔직하게 털어두어야 하는데, 용기가 필요했다. 만나는 동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남편은 대화하기 어려운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곧 용기를 가지고 교제를 시작하고 4개월이 넘어가던 어느 가을, 내 비밀을 이야기했다.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내 트라우마와 질병에 대해서 말이다.
박 블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시엔 박 블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늘 하던 대로 잠시 멍을 때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앞의 남자를 알지 못하는 나는 초조해했다.
박 블루는 내 손을 꼭 잡고, 내가 평생 기억하게 될 말을 두 가지나 전해주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어도 돼. 그건 내가 할 수 있어. 너는 나와 같이 살기만 하면 돼.”
우유부단한 면이 있는 박블루는 그날 확신을 담아서 이야기했다. 그 후로도 나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문득 이게 맞는 것가하는 고민을 했다. 결혼식 전날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미지의 미래를 걱정했다. 결국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야 했다.
가끔 20대의 나를 아는 친구들은 이렇게 물었다.
“왜 하필 박 블루와 결혼하기로 했어?”
나에게 결혼하자고 말했던 남자는 박 블루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 중에게는 키가 큰 남자도, 잘생긴 남자도, 그리고 돈이 많은 남자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가 달랐던 것은 하나였다.
“그냥…이 남자랑 결혼하면 평생 행복하게 살 것 같아.”
행복할 것 같다는 예감. 그의 어떤 면이 나에게 ‘결혼.’과 ‘행복.’을 같이 두는 마법을 선사했을까. 수십번 망설이던 내가 결혼식장에 신부로 등장하기로 결정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던 시절의 나는 불행했다. 뇌의 기능은 저하되어서 생각이 명료하지 않았으며, 소근육은 퇴화하였다. 소근육이 퇴화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려면 유아의 신체활동을 떠올리면 된다.
나는 숟가락질을 하다가 밥을 흘렸고, 젓가락 사이로 반찬은 흘러 내 옷은 늘 더러웠다. 옷의 단추를 잠그는 것에는 정말 많은 소근육이 필요하다. 다 자란 어른인 나는 아이처럼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했다.
“혼자서 겪기에 너무 힘든 일이다. 이제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단추는 내가 잠가주고, 밥을 먹다가 흘리면 내가 닦아줄게. 이제 걱정하지 마.”
내가 들었던 말 중, 가장 사려 깊은 말이다. 박 블루는 내가 그의 앞에 앉아서 내 이야기를 털어두는 동안 ‘이 여자를 데리고 평생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박 블루는 많은 사소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 박 블루는 결혼 전에 했던 이 약속은 어긴 적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옷이 더러워져도 괜찮았다. 박 블루는 식당에 가면 꼭 앞치마와 함께 물수건을 챙겨주는 자상한 남편이 되었다. 내 가정에 평화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깃든 이유는 남편을 잘 골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디즈니의 ‘마법에 걸린 사랑.’이라는 영화이다.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가 결합한 독특한 로맨틱코미디 영화는 마법의 동화 속 나라 안달라시아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지젤(에이미 아담스)은 순수하고 낙천적인 공주로, 왕자 에드워드(에임스 마스덴)와 결혼하려고 한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새어머니이자 사악한 여왕 나리사(수잔 서랜든)는 지젤이 왕자와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를 현대 ‘뉴욕시.’에 보낸다.
영원한 행복이 없는 냉혹한 시티에 도착한 지젤은 모든 것이 낯설고,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다 이혼 전문변호사 로버트(패트릭 뎀프시)를 만나게 되고, 그와 그의 딸과 함께 지내며 현실 세계에 적응해간다. 지젤은 점차 로버트와 가까워지며 새로운 감정을 느끼지만, 안달라시아에서 그녀를 찾기 위해 에드워드 왕자가 찾아온다.
영화는 지젤이 현실 세계에서 사랑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는 과정을 그린다.
동화 속의 공주님인 지젤은 영원한 행복이 있는 안달라시아로 돌아가는 대신, 이혼 전문 변호사인 돌싱남 로버트를 선택한다.
나에겐 마법에 걸렸던 야수와 지젤이 같아 보였다. 가끔은 마법에 걸려야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게 되는 맑은 눈을 가지게 된다.
평생을 함께할 남자를 찾기 위해서 마법에 걸렸다는 걸 당시의 나는 몰랐다. 힘겨웠던 시간은 언젠가 과거로 사라지고 자그마한 행복들이 수없이 피어나는 미래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것도 몰랐다. 역경을 헤쳐 나가 결국 행복해지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나의 병이 지나면 또 하나의 병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 시간도 지나가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박 블루씨는 내 보호자가 되어줄 것이다.
디즈니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장은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입니다. 디즈니의 영화 중에선 하이스쿨 뮤지컬이 있습니다. ost중 you are the music in me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라는 말을 아시죠, 그 이야기를 듣게 되나요? 거기엔 이유가 있어요.
당신이 꿈을 꿀 때 찾을 기회가 생길 거예요
작은 웃음 또는 ‘happy ever after.’ 오래오래 행복하게 란 것을요.
당신은 멜로디의 화음이예요, 내 머릿 속에서 울리고 있어요
하나의 목소리, 소음 위로
당신은 마치 흔한 줄거리처럼
나를 끌어당겨요
우리가 만나기 전에 당신을 알았던 것 같아요
설명할 수가 없어요
뭐라고 부를 이름도 없어요, 당신에게 말해준 적 없는 말을 노래로 불러줬죠
쉬웠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진짜 나를 보니까요
있는 그대로를 이해해주네요
내가 알고 있는 것 그 이상이예요.“
내 소설의 주인공이 결국 나라서, 모든 시련의 끝에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