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내 팔레트에 담긴, 브라운 화이트
오늘로 내 팔레트에 담긴 색깔들에 대한 소개를 마치려고 한다. 아직 내 팔레트에 담은 모든 색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색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준 독자분들에게 맘껏 털어놓은 것 같다.
오늘은 두 가지 컬러를 동시에 소개하고자 하는데, 브라운과 화이트이다. 그들을 한 번에 소개하기로 결정한 것이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나와 함께 만 10년째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화이트는 10월 12일을 기점으로 동거한 지 꼭 1년이 되었다.
그들은 내 고양이이다.
브라운의 이름은 김쵸파이다. 먼치킨 나폴레옹이라는 품종을 가진 브라운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형제들과 함께 있었다. 진열장의 유리 안에서 유독 형제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쵸파.
쵸파와 함께 살기로 결정하고 집에 데려오기까지 나에겐 고비가 많았다. 고양이를 처음 키워보는 초보 집사의 두려움과 사회초년생의 가난함이 결정을 어렵게 했다. 그래도 혼자 두기엔 너무 예뻤던 고양이는 내 동거인이 되었다.
처음 쵸파를 집에 데려왔을 때 나는 자취방에서 10분 거리의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점심시간엔 작은 고양이를 보기 위해서 달려왔으며, 그의 자그마한 돌발행동에도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10년 차 고양이 집사인 지금의 나는 쵸파가 다른 고양이들과 다른 점을 안다. 쵸파는 사회성이 부족한 고양이이며, 평균보다 겁이 많다. 사람뿐 아니라 같은 고양이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쵸파는 자신의 세계에 갇힌 고양이처럼 느껴진다.
지금 생각하면 쵸파는 처음부터 겁이 많았다. 그러나 초보 집사인 나는 나 때문에 쵸파가 겁을 집어먹어서 겁쟁이가 된 줄 알았다. 초보 집사는 고양이가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 줄 몰랐다. 겁도 없이 고양이에게 목줄을 채워서 밖으로 데려나가거나 이주에 한번 목욕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쵸파는 겁쟁이가 된 걸까. 몇 년 전, 신혼집에 들인 리클라이너 소파. 쵸파는 그 소파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잘못 조작된 리클라이너 소파에 꼬리가 끼어서 살갗이 벗겨지는 사고가 있었다.
겁쟁이 고양이는 제 꼬리에 달라붙은 붕대가 제 치료법인 줄도 모르고 위협하면서 물어뜯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넥칼라를 씌고 있어야 했다.
그때 유튜브를 보았는데, 고양이가 아플 때 숨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양이는 제 몸 안에서 일어나는 통증을 외부의 공격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그래서 적의 공격에서 숨기 위해서 구석을 찾아서 몸을 말고 숨는다는 이야기였다.
바보 같은 고양이에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내가 아프면서 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고양이가 아닌데도 내 안의 공격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방구석에 숨었다.
내가 만든 동굴에 틀어박혀 외부의 손길을 거부하면서 나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들을 불신하며 물어뜯었다. 그러다 문뜩 깨달았다. 나는 고양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동굴을 나와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밀어준 손을 잡았다.
우리 집의 둘째 고양이인 박구름은 막내딸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김맑음은 아이가 싫었고 우울했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아기고양이를 보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박구름을 만났다. 케이지 안의 조그마한 아기 고양이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연신 꾹꾹 이를 연발하면서 눈을 깜빡이던 초라하고 작던 고양이.
눈이 마주치던 순간부터 그녀와 함께 살게 될걸 알았다. 그러나 우리 집에 있는 겁쟁이 고양이가 걱정되었기에 돌아섰다. 잠들기 전까지 아기고양이가 눈에 밟혔다. 그리고 당장 전화기를 들었다. 내 눈에 너무 예쁜 아기고양이를 다른 사람이 데려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를 데리러 갔을 때 박구름은 자고 있었다. 단잠에 빠진 아기 고양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분양계약서를 먼저 쓰고 지켜보고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뜬 아기고양이는 나를 발견하자 야옹야옹하고 울면서 다시 꾹꾹이를 했다.
손을 뻗어서 품에 안자 고양이 특유의 그르릉하는 목 울림을 들려주었다. 2개월도 되지 않은 아기고양이는 첫날 내 품에서 어미의 젖을 찾았다.
박구름은 문밖으로 사람이 사라지는 걸 싫어했다. 처음엔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는데 격리기간 동안은 문이 열릴 때마다 경계하면서 숨어서 지켜보는 박구름을 보다가 깨달았다.
박구름, 내 화이트는 문밖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구름이는 문을 열고 사라진 나를 영영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문이 열리면 언제나 나와 남편이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기 고양이는 더는 숨지 않았다.
대신 문소리를 듣고선 귀를 쫑긋거리며 문 앞으로 뛰어와 다리에 뺨을 비볐다. 서툴렀던 김쵸파는 박구름을 거슬려 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아기 고양이에게 잘해주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그에 반해 박구름은 제 인간을 공유하는 게 싫었던 질투쟁이였다.
조그마한 고양이에게 밥그릇도 간식도 양보하던 김쵸파. 그리고 싸워서 쟁취한 걸로 착각하는 박구름.
고양이의 지능은 세 살 수준의 아이라고 한다. 나는 평생 세살짜리 아이가 어떤지 알 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고양이에 대해선 잘 안다. 그들은 어느 날 성장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머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집안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설거지를 하고 박구름은 청소기를 돌릴 테니 어머니는 쉬세요.”
오히려 달그덕거리는 설거지의 소리와 청소기의 시끄러운 진공음을 싫어해서 조용히 하라고 짜증을 낸다. 그래도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남편의 부모님에게 우리가 물질적인 혜택을 제공하지 않아도, 효도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를 사랑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존재만으로도 그분들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도를 많이 하기보단 불효를 덜 하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작은 고양이를 처음 키우기로 결정했을 땐, 그들을 통해서 무언가를 배우게 될지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 삶을 그들이 어떻게 바꾸게 될지도 몰랐다. 지금의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는 고양이들을 보면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동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장미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소행성 B612에서 자란 한 송이의 장미꽃을 돌보며 사랑하지만, 장미는 자주 까다롭고 허영심 많은 모습을 보인다. 그는 장미에서 멀어지기로 결심하고 다른 별들을 여행하게 된다.
어린 왕자는 여행 중에 다른 장미를 많이 만나게 되지만, 자기 장미만이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면 그 장미는 어린 왕자가 시간과 마음을 쏟아 돌봐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고양이들은 다른 고양이와 크게 다르게 생기지 않았다. 털 모양에 특징이 있는 쵸파와 달리 구름이에 대해서 누군가가 물었을 때 처음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구름이는 어떻게 생겼어요?”
“구름이는…렉돌처럼 생겼어요. 렉돌은 다 비슷하게 생겼어요.”
지금 나는 똑같이 생겼다는 또래의 100마리의 렉돌 중에서 정확히 구름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내 고양이가 귀를 움직이는 방식과 걷는 법, 울음소리까지 그녀를 다르게 만드는 요소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면서 나도 비슷비슷한 사람 중에서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