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6번째 퇴사기 : 병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9. 병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by 하루

목차

1. 저 다음 달에 퇴사합니다!

2. 요즘애들은 끈기가 없다고요?!

3. 나의 1번째 퇴사기 : 열정페이인데 경력인정도 안된다고?

4. 나의 2번째 퇴사기 : 계약직이라 이건 안되는데 저건 해야 돼?

5. 나의 3번째 퇴사기 :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렴

6. 낯선 휴식, 치열하지 않아도 괜찮아

7. 나의 4번째 퇴사기 : 관행? 이 정도는 괜찮다는 건 뭔데

8. 나의 5번째 퇴사기 : 가스라이팅 당한 거라고?!

9. 나의 6번째 퇴사기 : 병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10. 나의 N번째 퇴사기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나의 6번째 입사기 : 제발 좀 쉬어!


상처로 가득한 5번째 퇴사, 휴식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푹 자고, 푹 쉬고, 천천히 이직하는 게 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했다. 귀국 7일 만에 입사를 했던 하드워커인 나는 쉬겠다는 결심을 꺾고 한 달여 만에 바로 취직을 해버리고 말았다. 주변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나에겐 휴식이 필요하다며 나의 휴식 선언을 강력하게 지지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는 나름 있었다. 새로 들어가게 된 회사는 업무 자체에 매력이 넘쳤다.(적어도 나에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고, 새롭고 재밌는 일이 넘칠 것만 같았다. 아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이란 것도 굉장한 매력이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게다가 그게 뭐라고 나에게 한이 되어버린 '주임'이라는 직급의 공고였다. 주임이라는 직책이 말단이라는 사실을 아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전 직장에서 직책 가지고 가스라이팅 당하던 나에겐 내 이름 뒤에 붙을 몇 자가 중요하게 느껴졌었다.


열심히 잘해보리라 하는 각오로 들어간 회사는 불모지였다. 기관 자체가 시작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체계가 거의 잡혀있지 않았고, 서류도 엉망이었다. 내 자리는 6개월 내에 4번이나 사람이 바뀐 자리라고 하였다. 전임자도 1달을 채 근무하지 않고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거라 인수인계받을 것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처음부터 잡아가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열심히 서류를 만들고 체계를 잡아가려 애썼다.


야근 수당 : 제발 한만큼이라도 줍시다!


한 달 여가 지날 때쯤, 나는 새로운 직장에 자리를 잡고 생존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팀은 대리 1명, 주임 1명 2인체제였기에 모든 운영 관련 업무는 나에게 몰빵 되어 있었다. 게다가 운영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1층, 대리급은 2층에 사무실이 있었기에 하루 중 대리님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나는 혼자서 업무를 파악해야 했고, 필요한 서류들을 만들었으며, 지시 없이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업무를 해나갔다. 여기저기서 갈고닦은 생존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개소가 얼마 되지 않아 체계를 잡아가고 있던 우리 팀은 계속 바뀌던 내 자리가 채워진 이후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루에 1개씩 시범적으로 운영되던 프로그램들은 하루 2~3개로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체계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채로 업무가 늘어났다. 문제는 내가 한 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출근을 하면 오전에 서류, 운영상 준비를 홀로 마치고 그 외의 업무(재단과 지자체에서는 뭘 그리 많이 요청하는지)를 봐야 했고, 다음 달 프로그램의 기획을 위해 자료를 찾았다. 환경정리와 기자재 관리도 필수였다. 그 와중에 전화기는 쉴 새 없이 울려댔다. 1층 프로그램실에 혼자 있으니 전화를 받을 사람 역시 나뿐이었다.


오후가 되면 지하 2층에서 2층까지 프로그램실들을 돌아다니며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운영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이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저 프로그램이 끝났고, 저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이 프로그램이 끝났다. 전화기에도 불이 났다. 2층에서 준비물이 부족하고, 1층에선 아이가 다쳐 밴드가 필요하고, 지하 2층에선 아이들이 올시간을 넘어서도 안 온다고 연락이 왔다. 동시에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나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건강을 위해 켜두었던 만보기는 매일 1만 5천보에서 2만보를 찍었다. 귀가하면 매일 다리가 퉁퉁 부었다.


당연히 퇴근은 18시를 넘겼다. 활동이 18시에 끝나는데 칼퇴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퇴근을 해버리면 활동의 흔적들은 누가 언제 치운단 말인가? 코로나가 끝나지 않을 때라 업무는 더욱 가중됐다. 한 번이라도 아이들 손에 닿은 물건은 모두 소독해야 했고 그 양은 어마어마했다. 기기는 모두 충전해둬야 했고, 프로그램실들을 돌아보며 점검하고 나면 어느새 깜깜해졌다.


야근수당은 월 15시간까지만 주지만 야근은 절대 15시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입사 첫 해, 평균 퇴근시간은 8~9시 사이였다. 하루 2시간씩만 야근한다 해도 월 야근 시간은 총 40시간이었다. 그래도 다른 직원들도 그렇게 일하는 듯하니(사실 나는 1층에 홀로 있으니 다른 직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몰랐다)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었다.


너무 과하다 싶어 '이제부터 딱 15시간만 초과근무하자'라고 결심도 해보았지만 이뤄지진 못했다. 행사나 지도점검이 있을 때는 새벽까지 야근을 했다. 새벽 4시까지 야근을 하고 다음날 7시에 출근한 적도 있었다. 고단했다. 그래도 보람찬 하루의 마감이었다. 하루 종일 만났던 아이들이 즐겁게 놀다 간 것만으로도 하루치 보상은 충분했다.


병가 :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몇 달을 더 보내고 나니 보조인력이 지원되기 시작했다. 시니어 인력부터 시간제 선생님까지 한 명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여전히도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이전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돈다...?


새벽까지 야근을 일삼았던 행사가 끝나자 몸에 이상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며칠간 힘이 없는 건 누적된 피로로 인한 몸살이라 생각했는데 견디지 못할 어지럼증에 구토증세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번 겪어봤던 이석증인가 했는데 주말 내내 쉬어도, 약을 먹어도 낫질 않는다.


도무지 안 되겠어 회사에 연락을 드려 병가를 써야겠다고 말했다. 일단 걱정 말고 쉬라는 대리님의 말에 안심하며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집 밖을 나와 병원을 다녀왔다. 어지럼증에 쓰는 링거를 맞고 나니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다. 병가를 썼으니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는 생각에 2만 원가량을 내고 진단서도 발급하였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여 병가에 대한 휴가원과 진단서를 행정팀에 제출했다. 내가 내민 서류에 행정팀에서는 '진단서는 필요 없어요.'라고 답하였다. 그리고선 휴가원의 구분이 잘못되었다며 연차로 변경하여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내가 뭔갈 착각했나 싶어 취업규칙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취업규칙에는 분명 병가가 있었고, 증빙서류로 진단서나 소견서 1부가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구하자 돌아온 답변은 입원이 아니면 병가 사용은 불가하단 말뿐이었다.


이해가 안 되지만 따질 시간이 없었다. 여전히도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과 회복되지 않은 어지럼증은 그런 걸 따질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병가가 없다는 게 나의 퇴사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될 줄 그땐 미처 몰랐었다.


한계 : 무조건 버티는게 정답이었을까?


다시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 어지럼증은 갈듯 안 갈듯 출현했다 사라졌다 반복했다. 어지럼증은 특히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지하철, 버스, 차 등 움직이는 기계 위에서 더욱 심해졌다. 날씨의 영향도 있었다. 비가 오면 유독 심했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한 날은 연차를 내고 쉴 수밖에 없었지만 나머지 날들은 난간을 잡고 다니면서라도 출근을 했다. 내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사람이 당장 없다는 걸 알기에 이 악물고 출근을 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끝나가나 싶었던 어느 가을 나에게도 코로나가 찾아왔고,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격리기간은 7일, 도무지 회복되지 않는 내 상태에 입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병원에 문의해 봤지만 팬데믹에 고위험군이 아닌 30대 감염자가 입원할 자리는 없었다.


격리기간 7일이 지난 후 도무지 출근이 불가할 것 같아 연차를 쓰고 병원을 찾았다. 실신이 반복되고 있었으나 병원에서는 격리기간 7일이 지났음에도 검사 시 코로나 양성이 나오는 상태이므로 입원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날도 나는 연차를 쓸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 특히 같은 팀 직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4일 차 되는 날 나는 출근을 해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이 악물고 버티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하철역까지 엄마가 데려다주시고 지하철부터는 홀로 가기로 했다. 괜찮을 것 같다고 엄마를 보냈지만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과정에서 극심한 어지럼증으로 내려서 바로 주저앉았다. 구역질이 나오고 눈앞이 노래졌다. 그 상황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회사에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나 : 대리님... 저 지금 지하철인데 어지럼증이 너무 심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출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리님 : 알겠어요. 그런데 이런 건은 앞으로 센터장님께서 본인에게 직접 보고해 달라고 하셨으니 센터장님에게 전화하셔서 한번 더 보고하세요.

나 : 네 알겠습니다...


나 : 센터장님... 000 주임입니다... 현재 출근 중인데 지하철에서 어지럼증이 너무 심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출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센터장 : 알겠고, 그럼 오늘 본인 연차 쓴단 말이죠? 연가 몇 개 남았는지 잘 체크하세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지하철에서 쓰러질 것 같은 때는 구급차를 부르거나 도움을 청하는 게 먼저였을 것 같은데 나는 미련하게도 회사에 두 번이나 전화를 하고 나서 쓰러졌다.


센터장의 말은 마음에 꽤 오래 박혔다. '병가가 없어 아파도 연차를 쓸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서러운데 꼭 그렇게 말해야했을까?', '센터장님 입장에선 코로나 7일에 4일 연차니 인력비는게 싫으실 수 있지...', '내가 너무 민폐를 끼치고 있는게 아닐까? 그냥 지금 퇴사하겠다고 할까? 그럼 진행되던 일들은 누가...? 당장 누구를 구할 수 있나...?' 병원 천장을 보고 누워있으면 참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 나는 회사에 혼자 다닐 수 없었다. 처음엔 누군가 데려다줘야만 출근할 수 있었고, 이후로는 30분에서 1시간 일찍 나와 조금씩 쉬어가며, 주저앉아 기다려가며 이동했다. 원래도 아리송했던 나의 어지럼증은 코로나 이후 더 알 수 없는 양상으로 가고 있었다. 병원마다 말이 다르고 정확한 진단은 어디서도 받을 수 없었다. 안 좋은 날은 연차를 내고 쉴 수밖에 없었으므로 연차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퇴사 고민을 여러 차례 했었다. 처음 아팠을 때도 팀에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내가 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이후로도 계속 반복되는 어지럼증과 코로나로 인한 치명타로 내가 하차하는 게 맞지 않을까 여러 차례 고민했었다. 그때마다 팀에서는 내가 하차하면 팀의 업무를 다 아는 사람이 없어 안된다며 만류했고 나 역시 열심히 회복하며 버티려고 하였다.


하지만 온갖 좋다는 약과 비싼 한약을 지어먹어도 그때뿐이었다. 동료들에게도 미안했지만 나를 더 괴롭게 했던 건 곧 남편이 될 나의 남자친구와 가족들이었다.


저는 여기서 하차합니다!


결혼식이 있기 전 마지막 주, 긴 신혼여행을 앞두고 준비해두어야 할게 많은 나는 앞선 2주간 계속해서 야근을 했었다. 몸에 무리가 가는 걸 알았지만 나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동료들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가야 했다. 인수인계를 꼼꼼히 해놓고 없을 때 있을 일들을 미리 준비해 놓고 가라는 당부가 있었으니 자의 반, 타의 반 야근이었다. 2주간의 신혼여행 기간 동안 있을 일들을 일자별로 인수인계서 작성을 해두고, 당길 수 있는 일들은 다 당겨서 해두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에 일어남과 동시에 구토와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아... 안되는데... 다음주가 결혼식인데...'


온 집안이 왈칵 뒤집혔다. 예비 남편은 '결혼식을 앞두고 이렇게 일을 주는 회사가 어디있냐', '그 회사는 네가 없는 2주도 버티지 못할 회사여서 그 일들을 다해놓고 가라고 하냐'며 화를 냈고, 가족, 친구, 지인할 것 없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고 난리였다. 무엇보다 가슴아픈건 같이 코로나에 걸려서도, 그 후로도 계속해서 나 때문에 고생하며 마음아파하던 엄마의 말들이었다.


결국,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정말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억지로 버텨가며 일을 할 몸과 마음의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난 뒤에 퇴사하기로 가족들을 설득하였다. 애정을 가지고 일했던 만큼 너무 아쉬운 엔딩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속상해하는 가족들도, 쇠약해져 가는 나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저는 여기서 하차합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일했던 6번째 직장에서 하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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