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티너디 Oct 31. 2021

크루즈에서

유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고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의 일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 가주세요.


무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내 자아의 목덜미를 맨 처음  움켜쥔 것은 입안에  남아있는 알코올 섞인 과일향이었다. 눈꺼풀에 부딪혀 조각나는 백색광이 뒤를 이었다. 자아를 작살로 찍어 의식의 뱃머리로 집어 올린 것은 머리통 안에 유리가루를 넣고 문지르는 듯한 두통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펄떡거리다 눈을 떴다. 이불을 걷어올려 상반신을 일으켜 역순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기억들이 호두 알처럼 달그락거렸다. 쪼개졌다 합쳐지는 걸 무한으로 반복하며 왜곡된 파경으로 치달았다. 망각의 파도가 휩쓸고 간 폐허에서 쓸만한 이삭들을 주워 담아 양만 늘린 말간 기억을 요리할 수밖에 없었다.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흐리게 번진 장면들이 이어졌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세 가지였다. 선생님과 나는 와인을 마셨으며, 내가 울며 뭔가를 토해냈으며, 울고부는 나를 선생님이 부축해 이곳에 뉘였다. 옷을 앞뒤를 뒤집고  침대 요를 들쳐봤지만 불쾌한 시큼함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다행히  실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말을 토해낸 것 같았다. 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기억의 편린에서도 금이 가버리며 그 사이로 의심이 줄을 긋고 상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이 기억마저 쓰지 못 하기 전에 선생님을 찾아 물어야 했다. 작가이자 만취의 자아가 어젯밤에  무슨 무례를 범했는 지 알아야했다.


모든 것은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흘러들어온다.  갑판으로 걸어 나오자 온갖 감각들이 내 공간을 향해 밀려들어왔다. 파도에 부딪혀 수만 빛깔로 쪼개진 백색광, 코끝을 자극하는 바다 냄새나는 바람, 그리고 뒤이어 느껴지는 염분기 등이 이리저리 뒤섞이며 내 두통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손을 머리맡에 올려 빛의 커튼을 걷자 그 사이로 선생님이 드러났다. 선생님은 갑판에 서있었다. 나는 핏자국을 따라가는 살인마처럼 발을 질질 끌며 선생님 옆에서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선생님은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부르르 떨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고 곧바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혹시 저 지평선 끝에 전날의 신이 답을 걸어놓았을까 싶어 바라봤다. 검푸른  파도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렇게 바다가 넘실거릴 수 있나? 욕조에 반신욕을 할 때 항상 드는 생각이었다. 잔잔하게 부는 바람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저 바다 아래에 거대한 생명체가, 욕조에 잠겨있는 하반신처럼, 느리게 꿈틀대지 않는 이상  이런 파동으로  출렁거릴 수가 없었다. 크루즈 바로 아래에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어떤 기회를 노리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기회가 지금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와 선생님, 이 크루즈 전체를 휘감아 심해로 고속질주할 기회라고. 어제의 과음, 두통, 뱃속에서 올라오는 시큼한 트림마저도 모두 삼켜주기를 바랐다. 다행히 바다는 내 부름에도 계속 출렁일 뿐이었다.  심해의 구원자가 침묵한다면, 다른 방법은 내가 무로 향해 뛰어들 수도 있었다. 다이빙하는 중에 쪼그라들며 퇴화해 태초의 생물의 형태로 기원으로 돌아간 후, 말과 기억을 잃어버린 나체의 인어로 다시 태어나서 걸어올라온다면 어제의 기억 따위는 모두가 새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어제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일어나서 계속 생각했는데 이제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대답을 어떻게 드려야 하나 고민했어요.  고민을 좀 오래 했어요. 그러니까...”


나는 손을 들어 선생님의 말을 막았다. 다리 여러 개 달린 벌레를 잡듯 한 겹의 침묵으로 감싸덮어버렸다. 언젠간 들쳐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패된 오해가 스멀스멀 기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이 나에겐  찰나의 죽음부터 화석까지로 완성되는 시간의 길이였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징그러운 건 아니죠?”


선생님은 특유의 찬찬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어제  말씀해 주신 아이디 후보 5개 중에 ‘othersneedyman’이 제일 나은 것 같아요. 이것마저 징그럽게 느끼하다면 어쩔 수 없고요.”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억의 도화선이 빠르게 타올라 곧바로  무의식의 기억 창고를 폭발시켰다. 나와 선생님은 술을 마셨고 이야기가 잘 통했고 협업을 약속했다. 그리고 서로의 메일 주소를 교환했고, 선생님의 원래 아이디인 ‘insiders’는 심성과 어울리지 않다며 바꿀 것을 독촉했다. 그리고 5개의 아이디 후보를 토해냈으며 그중에 남들을 몹시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othersneedyman’이 들어있었다. 기억의 대폭발이 일어나자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허탈과 안도의 웃음이 튀어나왔다. 기억이라는 것이 연관된  감정마다 몸의 다른 부위에 저장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내 대답을 기다리며 멀끔한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건 좀 징그러운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도 선생님 생각뿐이시네요.”


나는 인사를 드리고  되돌아갔다. 다시 침대에 누워 기억의 잔해를 뒤질 차례였다. 뭐 때문에 울었는지는 찾지 못했으니까.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 작가님들을 곡해를 하고자 쓴 글이 아닙니다.

- 다만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엮어 새로 창작한 것으로, 이 곳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가상의 인물로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작가의 이전글 자기검열을 벗어던진 우정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