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에 놓인 미지의 문제나 상황에 당면했을 때 느껴지는 공포가 첫 번째이며, 두 번째는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새로운 것인가라는 의심이 들 때다. 하나는 나에게 새롭지 않고 익숙했으면 좋겠고, 나머지는 남들에게 익숙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양가적인 감정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난다. 내 시작점은 새로웠으면 좋겠지만 내가 가는 길은 사회에서 보장된 경로며, 쉽게 조언을 구할 수 있길 기대하며 질문을 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는 예술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 길을 포기하고 대중 장르로 돌아서야 할까요?’라고 묻는다. 이 질문엔 세 가지 질문을 이어야 한다. 자신의 예술을 이해시키려고 어떤 시도를 했는지, 자신의 예술이 돌아설 정도로 대중 장르와 대척점에 있는지, 돌아서기만 한다면 대중들을 열광시킬 역량이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쓸 때 시작점에서 멈칫 거린다. 인트로부터 절정, 완벽한 피날레의 몸짓을 보여주는 자신을 상상한다. 특별한 날엔 연극이 끝난 후 받는 박수갈채까지 귓바퀴에서 울리는 듯하다. 그래서 발을 딛지 못한다. 시작하는 순간, 글쓰기에 가능성이 있는 자신에서 밑바닥까지 껌끌게까지 동원해 소재를 긁어내는 현실의 나를 명징한 유리 바닥에서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소재들은 흔하다. 각각의 분량은 콩트 수준이며, 이전 소재와 이어지지도 않으니 책 전체의 짜임새를 짜기 힘들고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이 책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끝나도, 갑자기 글을 멈추고 2주 후에 글을 시작해도, 처음에만 소재를 언급한 뒤 급하게 소재를 바꿔도, 완벽하지 않아도, 글은 글이다. 오히려 이런 몸짓이 글 전체에 환기를 더해주는 듯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새로운 것은 없고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춤을 추고자 할 땐 한 쪽 팔은 위로, 다른 쪽 팔은 아래로 뻗어야 한다. 이 글을 읽는 지금 같이 해보자. 평소엔 하지 않을 법한 몸짓으로, 자신의 몸이 뻗을 수 있는 최대 반경을 확인하고 받아들여 양껏 표현하면 된다. 상상치도 못한 각도로 몸이 꼬이던 발이 엉켜 엎어지던, 리듬에 맞지 않는 게 무슨 상관일까. 내 몸짓이고 표현이고 글인데. 나도 부족하지만 이 '무지성 글쓰기'에 한 발 내딛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