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원을 일구는 마음으로

오늘의 흙을 고르고, 내일의 꽃을 기다린다.

by 김남정

가을이 깊어가며 햇살의 각도도 낮아졌다. 오전의 빛이 거실 유리창에 비스듬히 들어오면, 오래 키운 뱅갈 고무나무가 그 빛을 받아 손바닥만 한 초록잎이 더 빛난다. 그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다가온다. 잎사귀의 잎맥들은 더 힘차게 내게 에너지를 보낸다. 한 참을 거실 식물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중 문득 오래전 읽었던 책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은 두 가지 태도로 살아갈 수 있다. 건물은 세우거나, 정원을 일구거나."


그 말이 그때는 막연하게 멋있다고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 의미가 조금씩 몸으로 이해된다. 건물을 세우는 삶은 목표가 명확하다. 계획을 세우고, 단단한 기초를 닦고, 완성의 순간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간다. 그 길은 효율적이고 뚜렷하다. 그러나 한 번 완공된 건물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그 안에서의 삶은 안정되지만, 동시에 닫혀 있다.


나 역시 한때는 '건물을 세우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생들의 문장을 바로 세우고, 결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을 채웠다. 남편은 회사에서, 나는 수업 공간에서 각자의 벽돌을 쌓듯 살아왔다. 이제는 아이들은 성장했고, 집은 제 기능을 다했다. 문득 어느 날, 그 모든 것들이 완공된 건물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새로움이 자라지 않았다. 그때서야 나는 알았다. 내 삶에도 이제는 정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조금씩 다른 일을 시작했다. 여행기록을 촬영해 편집하는 법을 배웠고,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 베란다 작은 정원 식물을 돌보며, 하루를 '관리'가 아닌, '경작'의 감각으로 살기 시작했다. 정원을 일구는 일은 성과가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흙을 고르고, 씨앗을 심고, 기다리는 시간의 연속이다. 어떤 날은 잎이 타들어가고, 어떤 날은 태풍에 화분이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살아 있는 일이다. 완성되지 않았기에,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며칠 전 산책을 하다 아파트 울타리 벽 좁은 공간에 핀 들국화를 보았다. 싸늘해진 공기에 움츠려 핀 노란 들국화 한 송이, 시멘트 틈 사이에서 꽃은 자라고 피어 있었다. 그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 돌보지 않았는데도, 그곳엔 생명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정원의 힘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일단 뿌리를 내리면 스스로 자라는 생명. 그 자생의 힘이 삶을 지탱한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정원을 가꾸고 있다. 그 정원에는 오래된 습관도, 낡은 그릇도, 다정한 사람들과의 추억도 함께 자란다. 글은 그 정원의 흙이고, 나의 마음은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잎사귀다. 여름엔 열정으로, 가을엔 사유로, 겨울엔 침묵으로 채워진다.


남편은 오늘도 자판기를 두드리는 날 보고 말한다.

"오늘도 써?"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정원은 돌보지 않으면 금세 잡초가 무성해지거든."

KakaoTalk_20251030_150638651 (1).jpg


삶도 그렇다. 가만히 두면 무심히 쌓이고, 피로가 스며든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물을 주고, 흙을 고르고, 햇살을 비춰야 한다. 그 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가 어떤 일을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파울로 코엘료가 <연금술사>에서 말했듯, 정원을 일군다는 건 바로 그 믿음과 닮아 있다. 내 안의 우주가 자라날 수 있다는 믿음. 오늘의 작은 손길이 내일의 꽃을 피울 거라는 확신.


가을의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베란다 초록이들은 성장을 멈추고 보약 같은 가을빛을 온몸에 저장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짙어가는 가을빛을 느끼며 나만의 정원을 가꾼다. 건물을 세울 때는 끝을 향하지만, 정원을 일굴 때는 과정을 향한다. 삶은 끝이 아니라, 흙을 고르는 손끝에서 다시 시작된다. 오늘도 내 안의 정원은 조금 자라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keyword
수, 금 연재
이전 25화그런 생각을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