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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준 Oct 04. 2021

이제 여긴 우리가 접수한다.

24진, 25진 임무교대!

5월 10일(월)


드디어 24진과 25진의 임무 교대식, TOA(Transfer Of Authorization) 행사가 진행되었다. 


한국군에서는 임무 교대식이라고 표현하지만, 영어 원문의 해석에 좀 더 충실하자면 권한 이임식이 적절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 권한에는 한국군이 할당 받은 작전지역에 대한 일체의 책임이 따른다는 진부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다.


레바논에 주둔하는 유엔군은 한 개의 사령부 그리고 그 예하에는 두 개의 여단이 있다. 각각 동쪽과 서쪽을 담당하고 있어 동부여단, 서부여단이라고 불린다.


우리 한국군은 서부여단의 일원으로 임무수행 중에 있고, 24진과 25진이 임무를 교대하니 우리의 상급제대 지휘관인 서부여단장이 주관하여 행사를 진행했다.


서부여단장님은 이탈리아 준장으로 키 190cm에 마르신 체형이었다. 성격이 침착하시고 말을 천천히 하셨다. 크게 동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사회는 24진의 인사과와 24진의 통역장교가 맡았다. 행사는 한국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군도 있기에 한국어로 먼저 말하면 통역장교가 이어서 영어로 설명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24진과 25진 병력들이 연병장에 함께 서 있었다. 통역장교로서의 나의 임무는 식순 중 권한을 상징하는 부대기가 25진으로 이양된 순간부터 통역을 시작하는 것이다. 


통역은, 특히나 단상 위로 올라서 수 많은 병력들과 외부 귀빈들의 시선이 집중된 연설을 통역하는 경우 단순히 말 그 이상의 것을 전달할 수 있어야한다. 연사의 의도까지 녹여낼 수 있는 통역이어야 한다. 그간 24진의 임무수행에 대한 감사, 앞으로 우리 25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병력들에게 제시, 나아가서는 외국군들에게 한국군의 비전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속도는 어떻게 할 것인지, 어디서 끊을 것인지 함꼐 맞추고 또 홀로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 또한 연설자가 되어야한다.


행사가 하루 남은 시점에서 어떻게 준비할까 고민하다가 유튜브로 영어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았다. 강경화 전 외교부장관의 인터뷰 영상과 홍정욱 전 의원의 인터뷰 영상을 참고하여 천천히 또박또박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순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 이임사, 유엔기 이양 그 다음 마지막으로 취임사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 시 유엔가, 레바논 국가, 애국가 순으로 나왔다. 


유엔가는 경쾌한 느낌이 강했고, 레바논 국가는 가사는 알지 못했지만 비장했다. 레바논 국가가 끝날 때쯤 경례하는 팔이 아파왔다. 장담하건데, 행사병력 4/5 이상이 애국가까지는 어찌 견디는지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레바논 국가가 끝나자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팔은 아팠지만, 반갑고 또 뭉클했다. 역시 애국가는 해외에서 들어야 울컥한다.

머나먼 타지, 비행기로 장장 21시간이 걸린 이 해외에서 우리로 인하여 애국가가 울린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애국가를 들으며 우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울지 않고는 참지 못하는 감격을 누렸을것이다.


행사가 끝나자 더운 날씨에 베레모에 스카프까지 착용한 병력들은 모두들 서둘러 숙소로 복귀하였고, 나는 정자에서 서부 여단장의 환담회를 통역지원하였다. 이전의 행사는 그래도 미리 대본을 연습할 기회가 있었고, 어찌보면 사전에 준비된 스크립트 없이 즉시 답하는 동시 통역의 첫 경험이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부여단장님이 웃으며 베레모를 벗고 자리에 먼저 앉으셨다.

이마에 땀이 많이 맺혀 있었다.


모두들 정자에 앉아 물을 마시고 땀을 식히며 정신을 차렸다.


코로나 백신의 접종과 전개 초기의 작전에 대한 대화가 오고 갔다. 특히 길을 잘못 들어 정해진 곳이 아닌 곳으로 가면 헤즈볼라가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며 얼마 전 발생한 다른 대대의 예시를 들었다. 


이미 한국에서 파병 전 준비기간 귀에 못이 박혀라 들었던 내용이고, 우리측의 답변도 내가 예상한 답변이었다. 통역 또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고, 준비되어 있었다는 자신감에 잘 마무리 하였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통역이었다. 방으로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아직 컨테이너 한 동에 세 명이 살기에 땅바닥에 매트리스를 펴고 누웠다. 임무교대식을 오늘 실시 하였으니, 24진이 금방 복귀하겠지. 복귀하면 빈 생활관이 생기고 이제 나만의 공간을 기대할 수 있겠지.


선풍기를 틀고 천장을 보았다. 벌써 여기, 레바논에 24개의 한국군 부대가 진을 치고 지난 14년간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 바스코의 '187' 의 가사 중 '인생이란것은 마라톤이 아닌 끝이없는 릴레이, 받어 너도 언젠가.' 라는 부분이 떠올랐다. 


그러네. 마라톤이 아닌 바톤을 넘기는 릴레이네. 1개 진씩 그 진마다 부여된 기간동안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그 바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지금까지, 한 개의 14년 이라는 큰 덩어리가 생긴다. 


분쟁이 나지 않았다고 그 임무를 수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서 있음으로, 존재함으로 그 순간을 지켜냈고, 그것들을 모아서 큰 덩어리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다. 또 생각해보니 북한과 대치하여 철책을 지키는 것도 릴레이네. 한명 한명의 군복무가 모여 70여년 간 전쟁이라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그 순간은 그 순간으로 그냥 흘러간 것이다. 끝이다. 그 순간을 지킨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큰 덩어리는 없다. 14년간 분쟁을 막고 70여년간 전쟁을 억제하였던 시간은 의미가 없다. 평화란 기록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긴 세월 지켜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 억제하지 못하여 평화가 깨지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 분쟁을 억제하자. 평화라는 현상을 유지하자. 순간만 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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