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토해내듯 쓴다.
나는 대체로 분노의 시나리오를 써내렸었다.
분노가 나를 살게했었다.
초등학생때 따돌리던 친구를 도왔다는 이유로
나를 따돌리던 친구들에게 보란듯이
좋은 대학에 가고싶어 열심히 공부했고,
나를 혼자 둔 부모님에게 “그래도 인간이 자란다”는 걸 보이고 싶어 대학에 붙길 바랬다.
붙고 나서,
그제야 부모님에게 어느 대학에 지원을 했었고
어느 대학에 붙었는지 알렸다.
엄마는 내가 지원하지도 않은 교대에 내가 붙었다며
하지만 국립대를 갈거라며
이모들에게 갑작스러운 자랑을 해댔다.
딴이야기이긴하지만, 고모는 국립대 장학금을 받는 내게
“네가 지원한 과는 힘들데, 대학을 가지않는게 어때”라는 말을 했었다. 그걸 언니도 고스란히 옆에서 들었다.
솔직히 분노가 안생길 수 있었나 19살 아이에게,
누군가와 상의없이,
커지게 되었다
몸만,
그러다보니
대체로 분노에 휩쌓여 미운 마음으로
삶을 채우다 보니
나 자체가
저사람이 “나를 미워할거라는 불안”과
“나를 왜 미워하냐는 분노” 둘에
휩쌓여있었다는것을
뇌과학 몇십권을 읽고 나서야 그때서야,
알았다.
“분노는 주로 나를 돕지 않는다“
그런 분노를 끊어내는 방식은 분노가 올라올때마다
“어쩌라고” 라며 내 생각을 반박하는 일이다.
그리고 “별일이 아니다” “흙으로 가면 별일이 아니다“라고
나를 다독이는 일이다.
또
멍때리기.
멍때리는 건 자고먹고싸기 다음으로 정말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생각을 멈추는 법을
배운적이 없다.
그래서다.
내 삶의 원천이 분노라,
나는 생각꼬리물기 대회에 나가면
한치의 부끄럼없이,
모두를 가뿐히 제치고
나는 노력형 금메달리스트다.
그런 나는 일년에 한번 멍을 잡으면 많이 잡은 거였다.
아픔이 다녀간 후
지금은 그냥 매일이 멍.
때리라하면 바로 가능. 퀵서비스도 가능.
과거 어딘가에 쫒길땐
그만큼 잡힌적이 없다.
그만큼 뇌가 쉰적이 없다.
그래서 불안하고 분노에 더 휩싸였다.
당신의 멍이 당신을 잡는다면
쉽사리 잡혀주고 쉽사리 멍에게 자신의 뇌를 내어주어라.
그래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