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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게 Nov 07. 2024

동 루이스 다리

소설 <거기서 페리를 만나> | 포르투 편 : 1 화


"나는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며 슬픔을 무덤까지 가져가리"

- Nazim Hikmet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회색코트를 입었다는 것뿐이다. 그는 별 일 아닌 것처럼 차분히 오래된 두루마리를 펼쳤다.내가 결정을 망설이는 동안, 그는 길 가의 벤치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손을 내밀어 서명하자 그는 내가 드디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노라고 담담히 선언했다.







그 골목에서 페리를 만났다. 그는 고개를 꺾어 골목 위로 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골목 위로 열린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바닥 돌을 비추었다. 오랜 친구처럼 소중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기 있었지만, 반가운 악수를 나누지는 않았다. 높다란 담장 위로 귤나무가 겨우살이처럼 하늘에 붙어 자라 있었다. 나는 그가 바라보던 하늘을 올려 보느라 골목을 돌아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를 잃어버렸다.


햇살에 바랜 레몬색 벽을 따라 재촉해 걸었다. 청동 수도 펌프에는 이제 영영 물이 그쳤는지 물방울을 따라 생긴 하얀 녹조차 늘어져 있지 않았다. 얼룩 하나 없이 보송보송하게 마른 골목길에서 포근한 아침 냄새가 났다. 담장 사이사이 난 대문들 위로 풀관목과 선인장이 잔뜩 자라 있었다. 여행의 낯선 설렘으로 발걸음이 가벼웠다. 페리는 비탈 진 골목길이 보이는 계단 난간의 공터,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서 있었다.


“빈 집이 많죠. 갈매기도 많고요. 사납게 생겼는데 참 하얗기도 하군요. 배달부가 되면 아주 잘할 거예요.”


해가 잘 드는 동네 골목에 주렁주렁 열린 귤은 따가는 사람이 없어 곯아떨어졌다. 생활의 흔적이 주는 냄새가 났지만, 아침 식사를 차리는 소리와 빵 굽는 냄새는 희미했다. 페리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들자 두로 강을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는 거대한 두 절벽 사이를 잇는 높은 철교, 동 루이스 다리가 보였다. 그 다리만큼 높다란 종려나무가 바람에 자유자재로 그 잎을 흩날렸다. 까마득한 철교 아래로 낭만적인 검은 그림자가 아른댔다. 이국적인 향수가 가득한 짙고 싱싱한 초록에도 불구하고 아랫동네에서 바라본 종려나무는 아래쪽으로 곧 말라죽을 절망적인 운명을 예고하며 뻣뻣한 노란 잎을 펄럭이고 있었다.


“바삭하게도 말랐군요. 물이 코 앞인데.”


빈 집들을 한참 돌아 두로 강으로 계속 내려갔다. 밖으로 드리워진 검은 빨래 줄에는 아무것도 널려 있지 않았다. 빨랫줄에 매달린 도르래는 아무도 돌리는 사람이 없어 딱딱하게 굳어간다. 빛바랜 야외 플라스틱 의자와 파라솔. 그나마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정리되었는지 가지런히 쌓인 모양이 위로가 되었다.


바닥에는 벌겋게 녹슨 병뚜껑 몇 개와, 필터까지 바짝 쪼아 핀 담배꽁초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이제는 너덜너덜하게 바짝 말라 해질 대로 헤 진 바다의 물건처럼 피곤한 희로애락의 고뇌를 초월한 무게로 돌길 한쪽을 뒹굴었다. 동네 사람들의 흔적은 사계절 동안 넉넉히 쪼는 햇볕에 바래 영영 사라진 걸까. 실눈을 떠도 발산해 쳐들어와 쪼는 노란 햇빛이 하루 중 어느 때에도 가려지지 않는 이 골목은 살균을 넘어 멸균에 이르렀나.  우주 한 복판에 남겨진 듯 외로움이 밀려왔다.


페리의 발소리를 찾았다. 멸균기의 엔진 소리 같은 균일한 진동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비탈진 골목 끝, 식당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믿음직스러운 여행 안내자이자 포르토의 동반 여행자, 페리가 거기 있었다.






“이제 다 내려왔습니다. 길을 잃진 않았군요.”


고립되고 그늘 진 내 쪽으로 페리의 목소리를 따라 해가 들어왔다. 빛은 엄지발가락 쪽을 먼저 비추고 발등으로, 발목, 정강이, 무릎, 허벅지, 마침내 허리춤으로 올라왔다. 골목의 캄캄한 그림자를 벗어나 포르토의 넉넉한 빛으로 나가고 싶다. 허리춤에 멈춘 빛의 줄기를 따라갔다. 이 골목을 지나면 하늘로부터 내리쬐는 충만한 빛이 이 땅의 모든 세워진 것의 옥상을 비추듯 정수리를 타고 예외 없이 흘러내릴 것이다.


밑에서 본 동 루이스 다리의 첫인상은 ‘검은 철강으로 만들어진 2층 다리.’란 다소 실용적인 감상이었다. 먼저 다리가 세워지고, 그다음으로 아줄레주로 장식한 아기자기한 성당들, 전차가 다니는 돌길, 셰리 와인 창고, 오래된 성벽들이 빛을 발한 것이 분명했다. 포르토를 찾는 사람들 모두 제일 먼저 이 검은 철교로 걸어오게 되어 있다. 여행자들은 물빛 아줄레주의 색감, 도시 주변의 붉은 돌, 오래된 시골집 지붕에 솟은 이국적이거나 친근한 장식들은 잊더라도 이 검은 철교만은 기억하고 도시를 떠난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보다 새로 나타난 것이 더 큰 가치를 갖는 서운함은 모두가 겪는 일이다. 오래된 것들은 처음 세상에 나타났을 때보다 점점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이내 영영 사라진다. 포르토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던 날부터 수많은 꿈으로 반짝이며 지어져 끈질기게 존재하다가, 어느 날 세워진 이 검은 철교 덕에 새로운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 맛있는 바닷가의 음식들, 돌로 지은 예쁜 성당들과 오래된 길, 모든 것을 말리는 해, 선명한 스펙트럼의 하늘, 바다와 강 냄새가 섞인 이 산뜻한 바람. 아직 방문해 보지 못한 수많은 도시에서, 전혀 몰랐던 풍경을 우연히 마주하는 순간을 상상했더니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데도 마음이 차 올랐다. 누구나 가끔 그런 망향만으로 가슴이 가득 차거나 비어 버릴 때가 있다.


페리는 눈에 띄지 않는 회색 코트를 입고 대구구이 집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유로운 억양과 눈썹의 꿈틀거림, 생소한 입술의 모양, 찡긋거리는 코, 절묘한 타이밍에 짓는 적절한 크기의 미소가 완벽했다. 두로 강으로 내려오는 골목과 당당하게 절벽을 디딘 동 루이스 다리, 강변의 돌길, 오래된 배를 묶은 돌, 물에 젖은 밧줄, 대구구이 레스토랑 그리고 그 앞에 선 페리를 두고 셔터를 눌렀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대구구이는 다음에 먹도록 하죠. 간단한 메뉴는 어떻습니까?”

별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토 식 샌드위치는 어떻습니까? 여기 샌드위치는 좀 다르거든요. ”

“좋습니다. 그걸로 하죠. 이 도시를 잘 아는 모양입니다. 포르투갈 어도 하시고.”


페리는 빙긋 웃으며 강 쪽으로 더욱 가까이 걸어갔다. 펜스가 없는 짙은 강물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깊은 물이 꿀렁댔다. 두로 강변에는 아이들, 가족들, 커플들, 혼자 걷는 사람들 그리고 식료품을 배달하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포르토의 햇볕이 강의 경계를 선명히 비췄다. 아무도 위협적인 강물 속으로 발을 헛디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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